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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의 픽(pick) 무비] 영화의 정취에 젖은 내가 무너지고 깨어지는, '헤어질 결심'

[이은선의 픽(pick) 무비] 영화의 정취에 젖은 내가 무너지고 깨어지는, '헤어질 결심'

  • 기자명 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 입력 2022.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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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뉴스더원=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올해 칸영화제 공식 기자회견의 풍경 하나. <헤어질 결심> 공개 다음날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 외국 기자가 박찬욱 감독에게 물었다.

당신의 이번 영화에는 왜 폭력과 섹스가 없는가. 아예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기존 영화에 비해서는 그런 것이나 마찬가지다.

질문을 받은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다른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들었으면 이런 질문을 받지 않을 테다. 뭐가 있어서 왜 있냐고 물으면 답할 수 있겠지만 없는 걸 가지고 왜 없냐니(웃음).”

그의 모든 영화가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금기와 파격, 수위 높은 폭력과 섹스는 그간 박찬욱 감독 영화의 인장처럼 받아들여진 부분이 있다. <헤어질 결심>은 조금 다른 노선을 걷는다. 파격 대신 애수가, 폭력 대신 진한 멜로의 기운이 넘실댄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어른들의 멜로’라 규정했다. 대사가 적지는 않지만 인물들이 속마음을 감추는 장면이 많고, 그들이 주고받는 말의 속뜻을 파악하려면 어느 정도 세월을 살아본 사람이어야 가능하지 않겠냐는 뜻에서다. 

그의 표현대로다. 탐정(형사)물과 멜로가 독특한 형태로 결합한 이 영화 속에서 사랑은 간단하고 또렷하게 제시되는 감정이 아니다. 감독에게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한 곡이자 극 중 삽입곡인 정훈희의 ‘안개’ 가사처럼,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의 풍경 같은 것에 가깝다.

<헤어질 결심>은 설레는 관계의 시작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서로의 감정 때문에 모호하고 슬픈 이들의 한 시절을 목도하는 과정이다. 직접적인 단어를 직접 주고받지 않지만 온 얼굴과 마음이 사랑이라고 가리키고 있었기에 결국 무너져내린 이들의 이야기다. 

해준(박해일)과 서래(탕웨이)는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와 용의자의 관계로 처음 만난다. 등산을 갔던 서래의 남편이 산에서 떨어진 변사체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계는 미묘한 자장 안에 놓인다. 취조는 사건에 대한 구체적 심문이라기보다 궁금한 상대를 향한 질문과 대답의 과정에 가깝다. 이들은 형사와 용의자라기보다 손발이 잘 맞는 파트너처럼 보인다. 사건 현장은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읽어내리는 일종의 증거 같기도 하다.

해준은 잠복근무를 통해 서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호감에 근거한 시선이며, 서래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으로 그녀 역시 해준을 관찰하는 순간들을 만든다. 

산꼭대기에서 시작해 만조의 바닷가에 이르는 이동은 물리적인 공간의 동선인 한편, 인물들의 심리적 동선이기도 하다. 추락사한 남자의 사건 현장을 수사하기 위해 산꼭대기에 올랐던 형사 해준은 날카로운 직관과 올곧음을 갖췄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서래를 향한 의심과 애정으로 인해 무너지고 깨진다. 마음을 먼저 깨달은 여자 서래는 해준의 ‘영원한 미결’로 남기 위해 깊숙이 가라앉는 것을 택한다.

영화는 우회하며 엇갈리는 마음들을 통해 정서를 쌓아나간다. 서로가 비슷한 기질의 사람이라는 것은 알아보았지만 관계의 폭을 좁히기란 조심스럽다.

중국에서 온 서래는 이방인이자 이제 막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다. 해준에게는 기계적이더라도 애정을 이어가는 아내가 있으며, 지금껏 그는 직업적 자부심을 깔끔하게 지켜온 사람이다.

두 사람을 둘러싼 세상은 이들의 관계에 호의적이지 않다. 사랑의 시작은 결심하지 않았지만, 이들이 ‘헤어질 결심’에 놓이는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내 사랑의 시작과 당신의 시작이 같지 않다는, 함께 시작했더라도 같은 순간에 끝낼 수 없다는 슬픔 역시 안개처럼 두 사람을 에워싼다. 

서로 다른 언어 역시 관계의 비극을 고조시키는 동시에 흥미로운 멜로의 장치가 된다. 고전 사극과 드라마를 통해 말을 배운 서래의 서툰 한국어는 해준이 말을 곱씹게 하고, 스마트 기기의 번역을 통해 얼마간의 시차가 발생한 말들은 뒤늦은 마음을 부추긴다.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는 작품 안에서 문어체 대사의 탁월한 활용을 보여주는 콤비다. <아가씨>(2016)에서는 아예 한국어와 일본어를 오가며 언어의 이질성을 중심에 놓는 실험을 보여주기도 했다. <헤어질 결심>은 언어로 구축하고 유희한 이 같은 과정의 결정판 같은 인상을 남긴다. 

연기, 촬영, 미술, 사운드 등 모든 것이 어우러진 영상 예술의 미학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헤어질 결심>은 영화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작품이기도 하다.

알프레드 히치콕, 더글라스 서크, 클로드 샤브롤의 작품 등 여러 레퍼런스가 떠오르는 이유는 이 영화가 독창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만큼 다양한 결의 시네마틱한 순간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로 지금 시점에서 자신이 추구할 수 있는 어떤 경지를 목격하게 한다. 중요한 건 이것이 한 예술가의 도취적 결과가 아니라, 대중예술로서의 겸허한 제스처라는 점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들의 대사를 발음하고 영화의 미학에 나의 시선을 덧대보고 싶은 욕구를 가지게 한다.

이 영화를 본다는 건, ‘정취의 파도’에 오감이 흠뻑 젖는 경험이다. 사무치게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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