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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섭의 맛있는 역사] 술 한 잔으로 천하를 안정시키다

[장원섭의 맛있는 역사] 술 한 잔으로 천하를 안정시키다

  • 기자명 장원섭 원장
  • 입력 2022.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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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섭 본지 논설위원, 장안대학교 국제교류원장
장원섭 본지 논설위원, 장안대학교 국제교류원장

[뉴스더원=장원섭 원장] 술잔이 몇 순배를 돌면서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다. 거나하게 취할 무렵, 황제가 입을 열었다.

“경들과 나는 전쟁터에서 형제처럼 지냈던 사이였소. 경들이 없었더라면 어찌 지금 짐이 이 자리에 있었겠소? 진심으로 고맙소.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일매일 불안하기 짝이 없소.”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자신을 황제로 추대한 5명의 공신을 불러 가진 술자리였다. 황제가 된 지 겨우 몇 달이 지난 때였다. 5명의 공신은 긴장하며 일제히 황제를 쳐다보았다.

“경들의 부하들이 어느 날 술 취한 주군에게 황제의 옷을 입힐지 알 수 없지 않소? 나처럼 말이오. 짐은 경들을 전적으로 믿지만…”

다섯 공신은 혼비백산하며 그 자리에 엎드렸다. 황제는 술잔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인생이란 무엇이오? 절벽 틈을 달리는 말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거라고 하지 않소? 모두 하나같이 부귀를 원하고 편안하게 살다가 후손에게 물려주려고 하지만, 그조차도 지키기 힘드니 말이오. 경들은 각자 병권과 지위를 내려놓고 고향으로 내려가면 어떻겠소? 그러면 여생은 아무 염려 없이 평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오.”

공신들은 황제의 뜻에 따라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훗날 사람들은 이 일화를 두고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라 하여 “술잔을 들면서 공신들의 병권을 없앴다.”라고 하였다. 술 몇 잔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나라의 근심을 해결한 것이다.

907년, 절도사 주전충(朱全忠)은 부패한 당 왕조를 무너뜨리고 후량(後梁)을 세웠다. 그러나 겨우 17년 만에 후당(後唐)으로, 후당은 14년 만에 후진(後晋), 후진은 11년 만에 후한(後漢), 후한은 불과 4년 만에 후주(後周)로 바뀌었다. 모두가 지방행정권과 군권을 가진 절도사가 제위를 찬탈하는 식이었다.

조광윤은 927년, 가난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21세 때 집을 나와 천하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절도사 곽위(郭威)의 부하가 되었는데, 그가 950년에 후한을 무너뜨리고 후주를 세워 태조가 되었다. 그리고 태자 시영(柴榮)의 눈에 들어 그의 친구이자 오른팔이 되었고 시영이 954년에 황제(세종)로 즉위하면서 출세의 기회를 잡았다.

조광윤은 전쟁터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세종을 구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명성을 날렸고, 그 뒤에도 다섯 번 전쟁에 나가 모두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오대십국 혼란기 최고의 명군으로 존경받던 세종이 959년 거란 원정길에 갑자기 병사했다. 일곱 살에 불과한 어린 공제가 황제에 오르자 정국은 다시 불안해졌다.

960년, 거란군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해 출정했던 조광윤은 개봉 북쪽의 진교역에 주둔했다. 어린 황제가 즉위하자,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던 부하 장수들이 술에 취해 잠든 그에게 황제의 옷을 입히고는 억지로 황제에 추대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졸지에 황제가 된 것이다.

조광윤은 부하들의 권유에 따라 군대를 몰고 돌아와 황궁을 점령했다. 그리고 공제로부터 양위를 받아 황제에 올라 국호를 송(宋)으로 바꾸었다. 스무 살 때만 해도 어떻게 하루를 살아갈지 막막했던 그가 3백 년 송 왕조의 태조가 된 것이다.

조광윤은 즉위 후 자신에게 제위를 넘겨준 어린 황제와 그의 친인척들을 정중하게 대했다. 그는 태묘 안에 ‘맹서비(盟誓碑)’를 세워 두 가지 유훈을 새겨 후손에게 남겼다.

하나는 “전 왕조의 시씨(柴氏) 자손들을 죽이지 말고 우대하라.”였고, 다른 하나는 “사대부와 상소를 올린 자를 죽이지 마라. 아무리 불쾌한 말을 하더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였다. 오늘날 전해지는 ‘석각유훈(石刻遺訓)’이 그것이다.

조광윤은 황제가 되기까지 전쟁터에서 말을 달린 군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라를 얻는 것은 무력으로 할 수 있지만, 다스리는 것은 사대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빼앗을 때는 싸움을 잘하는 자들이 선봉에 서야 하지만, 빼앗은 것을 지키는 것은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사의 교훈에서 배운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떤가? 정권을 얻기까지 치열하게 싸운 투사들은 정권이 바뀌자마자 모조리 요직을 차지한다. 임기 마지막 날까지 논공행상에 열중하면서 권력의 맛에 취해 깨어날 줄 모른다.

전 정권의 요직에 있던 자들의 비리를 샅샅이 뒤져 모조리 도륙시키려고 집요하게 파고든다.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들은 포장만 화려하고 요란할 뿐 속은 비었다. 저잣거리의 반응은 당연히 관심 밖이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라! 곳곳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현대판 절도사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잊지 말라. 복수는 또 다른 보복을 가져올 뿐이다. 현명한 자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훗날을 경계함이 마땅할 것인 저.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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