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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판소리 중고제 맥을 이어가는 ‘심 家’ 사람들

[기획] 판소리 중고제 맥을 이어가는 ‘심 家’ 사람들

  • 기자명 박두웅 기자
  • 입력 2022.07.21 08:46
  • 수정 2022.09.2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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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심수봉’...판소리 중고제 명창 심 家의 DNA가 흐른다
심(沈) 씨 가문 100년의 전통예술 혼을 이어가는 외손녀 ‘이애리 씨’

충남무형문화재 27호 승무의 춤사위를 보여주고 있는 이애리 단장. (사진=박두웅 기자)
충남무형문화재 27호 승무의 춤사위를 보여주고 있는 이애리 단장. (사진=박두웅 기자)

[뉴스더원=박두웅 기자]  국민 디바로 불리는 가수 심수봉. 다른 가수와 다르게 자신만의 방식을 살려 부르는 그녀는 1978년 대학가요제에서 ‘그때 그사람’으로 데뷔해 ‘사랑밖엔 난 몰라’ ‘비나리’ 등 숱한 히트곡을 남겼다. 

그런 그녀에겐 한국 판소리 원류 중고제의 명창으로 일컬어지는 서산 청송 심씨 가문 100년의 DNA가 흐른다. 1951년 충청남도 서산에서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심민경이다. 

“제 집안이 말하자면 ‘중고제’(서편제·동편제 같은 판소리의 일종)로 유명하고 대를 이어 음악을 전수해온 가문이에요. 심매향 고모는 일찍 돌아가셨는데 할아버지(심정순 명창)가 칭찬하고 자랑스러워할 정도로 재능이 탁월했다고 들었어요. 아무래도 저한테도 그런 음악 DNA가 전해졌겠죠” 

2020년 12월 국악계 전설적 명창 심매향(1907~1927)이 1920년대 녹음한 유일한 가요 음반 ‘붉은 장미화’가 발굴된 것과 관련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중고제 가무악단 ‘沈’...‘舞, 타고 오르다’
심(沈)씨 가문 100년의 전통예술 혼을 이어가

충남무형문화재 27호 '심화영류 승무'의 한 장면(사진=박두웅 기자)
충남무형문화재 27호 '심화영류 승무'의 한 장면(사진=박두웅 기자)

트로트계에 심수봉이 있다면, 심(沈)씨 가문 100년의 전통예술 혼을 이어가고 있는 이가 있다. 우리나라 중고제 판소리의 보물 심화영(1913-2009) 선생의 외손녀인 이애리 씨다. 

예인(藝人) 심씨 가문의 대물림이 이(李)씨 외손녀로 넘어갔지만 중고제의 혼과 맥을 잇고 있는 그녀는 충남무형문화재 27호 승무 전수 조교이며, 중고제 가무악단 ‘沈’을 이끌고 있는 단장이다.

춤꾼 이애리는 할머니의 외모를 물려받는 데 그치지 않고, 기술에 집착하지 않으며 춤에서 '눈'을 콕콕 찍는 정중동(靜中動)의 예술인 심화영 선생의 승무를 제대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20일 저녁, 충청도와 경기 남부지역에서 성행한 판소리의 원류인 중고제 부활을 꿈꾸는 중고제 가무악단 ‘沈’의 기획공연이 서산시문화회관에서 펼쳐졌다. 

심상건의 풍류 가락과 함께 한 창작춤1. (사진=박두웅 기자)
심상건의 풍류 가락과 함께 한 창작춤1. (사진=박두웅 기자)

“舞, 타고 오르다”라는 주제로 열린 공연은 심상건 가야금 풍류와 창작 춤이 함께하고 삼도 사물놀이에 흥겨운 경고춤(성수희), 심화영류 승무(이애리), 심상건 가야금산조(김영희)와 여성미가 돋보이는 부채산조 춤(이애리)이 어우러졌다. 

심상건의 풍류 가락과 함께 한 창작춤2. (사진=박두웅 기자)
심상건의 풍류 가락과 함께 한 창작춤2. (사진=박두웅 기자)

풍류와 흥, 전통의 맥과 혼을 이어 난간 네 마당의 공연은 중고제 부활을 이야기하는 혼신의 몸부림이었고, 한 치의 늘어짐도 없이 박진감 있게 전개되는 공연에, 마치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 관중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삼도사물놀이와 함께 한 경고춤. (사진=박두웅 기자)
삼도사물놀이와 함께 한 경고춤. (사진=박두웅 기자)

이날 가야금에는 김영희(중고제 가무악단 ‘沈’ 기악분과장), 장단에 이은우(중고제 가무악단 ‘沈’ 성악분과장), 대금에 이용무(대전시립 연정국악원 단원), 춤에 성수희(승무 전수자), 그리고 삼도사물놀이에는 뜬쇠예술단(이권희, 김동학, 김호, 노길호)가 무대를 꾸몄다. 

심상건의 산조와 부채산조 춤. (사진=박두웅 기자)
심상건의 산조와 부채산조 춤. (사진=박두웅 기자)

판소리 3대 유파(流派)인 중고제
그 맥을 잇는 길목에 심정순 家가 있다

전라도 소리인 동편제, 서편제와 더불어 판소리 3대 유파(流派)인 중고제는 충청도와 경기 남부지역에서 성행한 판소리의 원류다.

염계달(廉啓達)을 시조로 삼는 중고제는 모흥갑(牟興甲)·김성옥(金成玉)·고수관(高秀寬)·김석창(金碩昌)·김정근(金正根)·김창룡(金昌龍) 등으로 이어지며, 충남 서산지역은 중고제 명창의 산실로 고수관, 방만춘, 심정순과 방진관, 심상건, 심화영 등으로 그 명성을 이어갔다. 

특히 일제 강점기 ‘우리 것’을 지켜내려 한 전통 공연예술의 몸부림 속에 큰 획을 그은 서산의 심정순 가(家)는 한국 판소리계의 흥망성쇠와 그 운명을 같이했다. 일제는 우리 소리를 우리네 문화에서 거둬내고 일본 전통가요인 ‘엔카’를 심었다. 그렇게 시대를 노래하던 우리 소리는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중고제 판소리 소리의 맥은 고수관·방만춘·방진관·김봉문·이동진 명창 등이 있어 가능했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암흑기 속에 서산 중고제 판소리의 명맥이 유지되어온 것은 심정순, 심재덕, 심매향, 심상건, 그리고 지난 2009년에 작고한 ‘심화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 심화영 선생과 살아 생전 승무를 전수 받고 있는 이애리 단장(사진=이애리 씨)
고 심화영 선생과 살아 생전 승무를 전수 받고 있는 이애리 단장(사진=이애리 씨)

심화영 그녀는 명창 심정순의 딸이자 가수 심수봉의 고모로 예인 집안의 가통을 이어오면서 판소리뿐만 아니라 춤사위도 뛰어나 ‘심화영류 승무’로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도 했다.

심정순은 1873년 충남 서산 학돌재에서 태어났다. 그는 판소리와 가야금병창, 산조, 재담 등으로 일가를 이룬 뛰어난 국악 명인으로 큰아들 심재덕과 큰딸 심매향, 작은딸 심화영, 조카 심상건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인 국악인 심정순 가(家)를 이루었다.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되는 20세기 초반 피리와 퉁소의 명인 심팔록으로부터 기예를 물려받은 심정순은 당시 서울 무대를 쥐락펴락한 최고의 예인으로 인정받았다. 1910년대 초반 서구식 극장인 장안사 소속으로 이른바 ‘심정순 일행’을 꾸려 지방 순회공연을 하러 다닐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또 1911년 음반취입을 하고, 신문연재, 방송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면서 선구자적 면모를 과시하였다.

그런 심정순은 서구문물의 유입과 일제 강점기라는 격동의 시기에 우리의 가무악을 보전 전승하기 위해 치열한 활동을 전개했다. 내포제 거장 홍성 출생의 한성준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 조선음률협회, 조선음악무용연구회 등 각종 단체를 결성하여 사라져 가는 전통예술의 맥을 잇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특히 쇠퇴해가는 조선 가무악의 침체는 그들로 하여금 민족예술을 보존 계승해야 한다는 책무를 일깨웠다. ‘우리 것’을 지켜내려 한 전통 예술인들의 민족혼이었고 몸부림이었다.

당시 심정순이 운영하던 서산의 율방 낙원식당은 전통예인들의 사랑방으로 내포 지역의 명소가 되었고, 당시 낙원식당에 드나들던 예인으로는 명창 이동백을 비롯하여 김창룡, 한성준, 이화중선 등 당대 내로라하는 명인 명창들이 총망라되었다. 이처럼 ‘낙원식당’은 우리의 가무악을 지켜내는 아지트요, 전통 예인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행정의 무관심 속에 사라진 중고제 흔적들
해미읍성 안 장시에서 펼쳐진 ‘판소리’ 재현하고,
율방 낙원 복원 및 중고제 명창 기리는 추모제 열려야

심화영 선생이 작고한 지 8년이 지난 2017년 12월. 읍내동 2-14번지에 위치한 구옥 낙원식당이 전통 문화예술인들의 보존 호소에도 불구하고 철거되고 말았다.

철거 당시 주차장을 만들겠다는 건물주에게 문화유산의 보존 가치에 대한 설득은 전혀 먹이지 않았다. 시 당국의 무관심도 한몫했다.

이처럼 근대 중고제의 유서 깊은 공간인 율방 서산 낙원식당의 소실은 안타깝다 못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되어 버렸다.

또한 지역 문화 축제에서 중고제의 공연이나 프로그램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안타깝다. 매년 10월이며 서산지역 최대 축제인 해미읍성 축제가 열린다. 

서산 해미읍성 전경(사진=박두웅 기자)
서산 해미읍성 전경(사진=박두웅 기자)

구한말 해미읍성은 중고제 김석창·이동백 명창 일화가 전해지는 공간이며 무대였다. 장시(장날)는 민가가 들어 있는 해미읍성 안에서 열렸다. 장날이었으니 읍성 안은 인근 보부상과 백성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으로 그려진다. 장시가 열리는 곳에서 판소리 한마당이 펼쳐지는 것은 당시 공연무대가 특별히 없던 시절엔 당연한 일이었다. 

중고제 김석창과 이동백 명창 일화는 해미읍성 장시에서 생겼다. 김석창은 이동백과 김창룡의 선배다. 일화에 의하면 <춘향가> 중 ‘마부타령’을 잘했던 김석창과 새소리 타령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이동백이 해미읍성에서 소리를 했다. 

1960년대 해미읍성 진남문 모습. 당시 관공서, 학교, 민가들이 읍성 안에 있었다.(사진=서산문화원 자료)
1960년대 해미읍성 진남문 모습. 당시 관공서, 학교, 민가들이 읍성 안에 있었다.(사진=서산문화원 자료)

공연이 끝나고 소릿값으로 김석창은 100냥, 이동백에게는 15냥을 주니 화가 난 이동백이 그릇을 깨고 돈을 받지 않았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층 분발한 이동백은 전국 제1의 명창의 대열에 오른다. 이는 공주 故 박동진 명창이 생전에 전해 준 말이다. 

에필로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제라도 근현대 전통 공연예술사를 쥐락펴락한 국악명인을 배출한 서산의 전통문화유산의 가치를 재인식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해미읍성에서 중고제 판소리 한마당이 펼쳐지고, 서산 출신 명창은 물론 중고제 명창들의 합동 추모제를 개최함으로써 서산 중고제의 브랜드가치를 높이고, 관광 자원화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이번 중고제 가무악단 ‘沈’의 “舞, 타고 오르다” 기획공연이 남다르게 가슴속 깊이 울림을 주는 이유는 일제강점기 민족예술을 지켜나가고자 몸부림쳤던 심정순 家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뼛속까지 사무치는 결의가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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