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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의 픽(pick) 무비] 성공적 이륙, 덜컹거리는 착륙의 '비상선언'

[이은선의 픽(pick) 무비] 성공적 이륙, 덜컹거리는 착륙의 '비상선언'

  • 기자명 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 입력 2022.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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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뉴스더원=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한재림 감독이 연출한 <비상선언>은 올해 여름 한국영화 텐트폴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동시대성을 감지할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항공기 테러라는 사건은 극화된 재난이다. 하지만 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현실의 풍경들에 근접해 있다.

감독은 재난 자체보다 재난이 일어난 사회적 상황들과 사람들의 선택을 더 중요하게 그리고자 한다. 이는 <비상선언>의 비범함이기도 하고,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비상선언’은 재난 상황에 직면한 항공기가 더 이상 정상적 운항이 불가능할 때 무조건적 착륙을 요청하는 항공 용어다. 극 중 하와이를 향해 가는 KI501편으로부터 선포된 선언이기도 하다.

이 비행기에는 딸과 함께 탑승한 재혁(이병헌)을 포함해 수많은 승객이 있다. 재혁은 공항에서부터 수상쩍게 행동하던 진석(임시완)의 존재가 거슬린다.

비행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객 중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사망한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치명적 바이러스를 유포한 결과임이 밝혀지면서 기내는 아수라장이 된다.

탈출 자체가 불가능한 비행기에서 치사율 높은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한 사람은 없다. 기장과 승무원들마저 속수무책으로 감염되는 상황에서 부기장(김남길)은 결국 비상선언을 내린다.

지상에서는 국토교통부 장관 숙희(전도연)를 중심으로 비행기를 안전하게 착륙시키려는 이들의 분투가 시작된다. 형사 인호(송강호)는 테러를 예고했던 범인의 진짜 동기와 바이러스를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하는 동시에 승객 중 한 명인 아내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기내와 지상을 번갈아 오가며 이야기를 펼치는 <비상선언>은 중반부까지 재난 블록버스터의 공식에 충실한 연출을 보인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의 공포를 묘사하는 방식은 압도적 실감으로 다가온다.

애초에 테러범의 정체와 의도가 크게 중요한 영화는 아니다. 범인은 영화 초반부터 밝혀지며, 그는 사건을 일으킨 뒤 빠르게 퇴장한다.

핵심은 이 인물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재난의 속성이다. 범인은 처음부터 주도면밀하게 테러의 대상을 정하지 않았다. 그에겐 항공 테러라는 느슨한 계획만이 존재했으며, 공항에 도착한 뒤 승객이 가장 많이 탈법한 행선지와 편명을 고른 게 전부다.

목적지가 다른 곳이었다 해도 상관없다. 범인은 그저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길 원한다. 그가 다른 비행 편에 탑승했다면 전염병은 전혀 다른 이들에게 일어났을 것이다. 우연히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겪을 수 있는 것. 이것은 오늘날의 재난이 탄생하는 방식이며, 차별 없는 공포다.

바꿔 말하면 재난에 있어 ‘남의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당연하게도 그 명백한 사실을 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풍경 역시 마찬가지다.

기내에서는 자신보다 타인의 안전을 먼저 염려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감염 증세가 발현된 이들로부터 떨어지려 혈안이 된 이도 있다.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히는 자와 행하는 자는 빠르게 갈린다.

땅 위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비행기에 탄 승객들의 가족은 속이 타들어가지만,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 전염병이라는 데 초점을 맞춘 사람들은 비행기의 착륙을 격렬하게 반대한다.

비상착륙하려는 항공기의 상황을 둘러싼 국제 정세 역시 긴박하게 돌아간다. 승객들의 안전한 착륙을 우선해야 하는 한국의 입장과,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바이러스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타국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선다.

이는 단순히 영화 속 풍경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코로나19라는 재난을 겪으며 우리는 혐오와 이기주의가 빠르게 퍼져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해왔다. 영화를 보는 누구나 자신은 비행기의 착륙을 반대하는 시위대가 아니라 선의의 편에 서있다고 생각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비상선언>은 그렇게 일부의 영웅을 내세우기보다 재난을 극복하는 최소한의 가능성일 수 있는 인간성을 관객 각자에게 질문한다.
 
여기에서 그쳤다면 <비상선언>은 인상적 재난 블록버스터로서의 역할에 무난하게 그쳤을지 모른다. 후반으로 치닫는 동안 영화는 조금 더 과감한 선택을 한다. 재난 상황에서 ‘인간이기에’ 택할 수 있는 사회적 성숙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극 중 인물들이 내리는, 인류애에 기반한 어떤 선택은 이 영화가 다른 재난영화와 비교해 스스로 가질 수 있다고 믿은 차별점이었던 듯하다. 이 과정에서 <비상선언>은 한국사회의 국가적 재난 중 하나인 세월호를 직간접적으로 강하게 환기시킨다.

이는 한 명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재난을 바라보는 창작자 개인의 소회와 장르영화 연출가의 역할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던 시도로 보인다. 다만 이것이 다소 노골적인 감정의 호소이자 조금은 교조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제언이라는 점에서 가장 적절한 형태였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비상선언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엄중한 긴급함이 무색하게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분절 제시되는 듯한 결말 구조 역시 신선함보다는 피로감을 더 크게 안기는 게 사실이다. 이륙과 비행이 성공적이었기에 덜컹거리는 착륙이 아쉬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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