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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역사탐방] 절개의 고장, 장수에서 논개를 만나다

[기획: 역사탐방] 절개의 고장, 장수에서 논개를 만나다

  • 기자명 송미경 기자
  • 입력 2022.09.21 11:25
  • 수정 2022.09.22 13:25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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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한 의사(義士)
주씨 성을 가진 장수태생의 의병장 최경회의 부인
의암 주논개의 혼과 영정 있는 논개사당

전라북도 장수군에 있는 논개사당 입구 앞 바위에 새겨진 시인 변영로의 추모시. (송미경 기자)
전라북도 장수군에 있는 논개사당 입구 앞 바위에 새겨진 시인 변영로의 추모시. (송미경 기자)

[뉴스더원=송미경 기자] !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 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변영로, 시집 <조선의 마음> 중에서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기자였던 변영로는 1922년 논개를 기리기 위한 추모시를 발표했고, 그 시는 전라북도 장수군에 있는 논개사당 입구 앞 바위에 새겨져 지금까지 전해온다.

흔히 논개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투신해 큰 공을 세운 기생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녀의 의거가 전쟁의 혼란 속에서 곧바로 기록되지 못하는 바람에 출신과 삶 등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때문에 논개가 왜장과 투신한 기생이라는 사실 외에 그녀가 일개 기생이 아닌 주(朱)씨 성을 가진 의병장 최경회의 후처이며 장수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논개에 대한 문헌기록은 17세기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처음으로 등장했고, 18세기 이후 논개의 자취를 찾으려는 노력이 이어져 고증과 민간에 떠도는 구전까지 포함해 기록하면서 대략 논개라는 인물의 가계와 일생이 재구성됐다.

전라북도 장수군 임내면 대곡리 주논개 생가. (송미경 기자)
전라북도 장수군 임내면 대곡리 주논개 생가. (송미경 기자)

 전북 장수출신 주씨성을 가진 논개

논개의 성은 주씨이며, 선조 7년인 1574년 전라북도 장수군 임내면 대곡리 주촌 부락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주달문은 마을에서 훈장을 했으며 모친은 밀양박씨다. 나름 양반가의 딸이었던 논개는 그녀가 5세 되던 해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딸과 자신의 생계를 시동생 주달무에게 의탁하게 된다.

그러나 주달무는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논개를 마을 부자였던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팔아먹고 달아났다. 딸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도망쳤고 돈을 낸 김풍헌이 관아에 고발하면서 당시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가 재판을 맡게 됐다.

최경회는 논개 모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 무죄방면했으며 이것이 인연이 돼 논개가 17세 되던 해 최경회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됐다. 이후 임진왜란이 터지자 논개는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장이 된 최경회를 따라다니며 뒷바라지했다.

 의병장 최경회와 논개...남강의 꽃이 되다

최경회는 각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쌓아 1593년 경상우병사가 돼 진주로 부임하게 됐으며, 이때 논개는 그를 따라 진주성에 들어왔다. 당시 전황에서 진주성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진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일본군은 1593년 6월 10여 만의 대군을 동원해 총공세를 취했다.

약 7천 명의 관군과 의병들은 진주 관민들과 함께 7일 간 항전했고 결국 진주성은 7월 29일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던 날 최경회는 김천일 등과 함께 진주 남강에 투신해 자결했고 성에 진입한 일본군은 진주성내의 6만여 백성들을 모두 학살하고 주변을 약탈했다. 그리고 왜장들은 승리에 한껏 도취돼 남강 변 촉석루에서 술판을 벌였다.

이때 논개는 연회가 벌어지던 촉석루에 들어가기 위해 관기로 위장했다. 당시 촉석루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은 관에 소속돼 있는 기생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촉석루 잠입에 성공한 논개는 의도적으로 술에 취한 왜군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게를 꾀어내 함께 남강의 바위 위에 올랐다.

그리고 논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손가락에 가락지를 낀 양손으로 왜장의 허리를 껴안고 그대로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논개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왜장을 죽인 후, 지휘관을 잃은 일본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일본군도 성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진주성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에 많은 병력 피해를 입어 진주를 계속 점령할 힘이 모자라는 상황이었다. 결국 일본군은 어렵게 진주성을 점령했지만 최종 목표인 전라도 진격을 포기하고 서둘러 진주에서 떠났다.

의암 주논개 상. (송미경 기자)
의암 주논개 상. (송미경 기자)

 왜적 몰아낸 원동력이 된 ‘의암(義巖)’

그 후 논개는 17세기 전반까지 나라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진주에서는 그녀를 기리는 제사가 해마다 남강 변에서 일반 백성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또 그녀가 왜장을 안고 떨어졌던 남강의 바위에는 의로운 바위라는 뜻으로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다.

이를 보면 진주성 백성들은 진주성 함락 후 완전히 절망상태에 빠졌던 당시 상황에서 한 여인의 몸으로 목숨을 바쳐 왜장을 죽인 그녀의 복수에 승리의 희망을 느꼈고, 왜적을 몰아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고 평가했던 것 같다.

논개에 대한 국가적 보상은 18세기 초 경종대에 가서야 가까스로 이뤄졌다. 진주성민의 계속된 요청을 받아들여 의암사적비를 세워 그녀의 순국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논개를 기리는 사당인 의기사가 의암 부근에 세워졌다. 그리고 논개에 대한 추모제가 매년 나라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러졌다.

현종 12년(1846) 논개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생장향수명비석. (송미경 기자)
현종 12년(1846) 논개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생장향수명비석. (송미경 기자)

또 1846년 장수현감이었던 정주석이 논개의 순절을 높이 찬양하고 그녀의 태생이 장수임을 기리기 위해 논개 생장향수명비(生長鄕竪名碑)를 세웠다. 생장향수명비는 일제 강점기에 파괴될 뻔 했으나 마을 청년들이 이를 미리 알아차리고 밭에 묻어두어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54년 장수 군민들의 성금으로 촉석루 곁에 지어진 논개 사당. (송미경 기자)
1954년 장수 군민들의 성금으로 촉석루 곁에 지어진 논개 사당. (송미경 기자)

 장수군민의 날’이 된 논개의 순절일

1954년 장수군민들의 성금으로 촉석루 곁에 논개 사당을 지어 의암사라 명하고 위로하는 추모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군민들은 논개의 의절을 잊지 않고 1968년부터 논개가 순절한 7월 7일을 ‘장수 군민의 날’로 지정하고 1974년 논개사당 의암사를 오늘날 장수읍 두산리로 옮겨와 성역화에 마침표를 찍었다.

논개사당은 2만 여 평 대지에 조성됐고 외삼문, 내삼문, 충의문 등 세계의 문으로 층을 이루고 있다. 또 논개 생장향수명비도 이곳으로 옮겨져 보존돼 있다. 이곳 사당에서는 매년 논개의 생일인 음력 9월 3일에 그녀를 기리는 제례를 지낸다.

현재까지 논개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 하나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그녀의 신분이 번듯한 가문의 아녀자가 아니고 일개 진주성의 관기로 알려지면서 의도적으로 무시당하고 외면당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 없는 일반 백성들은 오랜 시간 그녀를 기억하고 자발적으로 기려왔다. 그녀가 일개 기생인지 아닌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가녀린 한 여인이 행한 결연한 행동으로 조선의 백성들은 전쟁의 참상과 고통을 극복하고 마지막까지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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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두박근 2022-09-21 17:44:42
논개가 장수사람이었구나 장수군에서는 홍보 좀 제대로 했음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