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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내포지역 포구이야기 서산시 부석면 창리포구②

[기획] 내포지역 포구이야기 서산시 부석면 창리포구②

  • 기자명 박두웅 기자
  • 입력 2022.09.27 10:11
  • 수정 2022.10.11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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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낚시터를 오가는 창리 승선장 (박두웅 기자)
바다낚시터를 오가는 창리 승선장 (박두웅 기자)

[뉴스더원=박두웅 기자] 홍성IC를 나와 서산을 거쳐 태안으로 가는 국도 77호선. 이 길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선조들의 땀과 피눈물이 쌓이고 쌓인 애환의 길이기도, 정주영 현대 회장의 천수만 방조제 공사로 상전벽해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길이기도 하다.

 창리는 조선 말 화변면 ‘주사창(舟師倉)’이라 불렸다
 한국수산지...‘남성은 중선업, 여성은 낙지, 게 등을 채취’

옛 창말나루터 자리. (박두웅 기자)
옛 창말나루터 자리. (박두웅 기자)

1920년 조선총독부가 정리한 <한국수산지>에는 ‘창촌리(현재 창리)는 군의 남단에 위치하고 화변면에 속한다. 후면은 언덕을 등지고 있고 앞은 비탈져 있다. 자갈과 모래가 섞인 해안가는 만조 시에는 좋은 항만의 상태이지만, 썰물 시에는 해안 개펄이 150간(273m, 1간=181.818cm)이 전부 드러난다. 또 조류가 급격해서, 그 위치는 마치 해운의 요충지에 적당하므로 선박이 자주 왕래했다. 인가는 52호이며 부근에 논이 64두락(마지기, 200평), 밭 20두락(마지기, 300평)이 있다. 주민들은 주로 중선업에 종사하고 여성은 낙지, 게 등을 채취하며 밖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라고 기록돼 있다.

 ‘죽음이라는 비극’이 일상인 어촌마을의 숙명
 정월 초이튿날, 한날한시 제사 모시는 집 많아

창리포구. (박두웅 기자)
창리포구. (박두웅 기자)

간척지 사업이 막 시작되기 전까지 창리 갯마을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사건이 많았다. 천수만 갯벌은 바다에 익숙한 장정이라도 썰물 때를 조금이라도 놓치면 밀려오는 물살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깊은 갯골을 휘감아 들어오는 밀물이 순식간에 사람을 덮친다.

1980년대 초 폭염이 푹푹 찌는 한여름. 강당분교에 다니는 어린 학생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바다로 놀러 갔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사건이다. 무려 6명이나 되는 어린이들이 앞 개에서 놀다 그만 밀려 들어오는 바닷물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죽은 아이 중에는 형이 먼저 나왔다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동생을 구하러 다시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었다. 지금도 그 아이들의 부모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시커먼 멍을 가슴에 안고 살고 있다. 

창리 바닷가 마을 풍경. (박두웅 기자)
창리 바닷가 마을 풍경. (박두웅 기자)

바다를 생업으로 살아가는 어촌마을의 숙명은 ‘죽음’이라는 친구가 너무 가까이 있다는 현실이다. 창리에는 정월 초이튿날 한날 한시 제사를 모시는 집이 많다. 그리 먼 옛이야기도 아니다.

정월을 맞아 연평도 쪽으로 조기잡이 나간 중선배가 풍랑을 만나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소식을 전해 받은 마을은 한동안 통곡의 울음소리로 끊이지 않았다. 눈물조차 말라버린 창리 여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 년을 넘게 날마다 바닷가에 나와 남편을 기다렸다.

지금은 깊게 팬 가슴의 상처로 남았지만, 제삿날이 오면 창리 여인들은 망부석처럼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만 본다.  

 풍어와 무사귀한을 비는 ‘창리 영신제’
 산신당·철마상은 사라지고 영신당만 남아

풍어와 무사귀한을 비는 ‘창리 영신제’. (박두웅 기자)
풍어와 무사귀한을 비는 ‘창리 영신제’. (박두웅 기자)

바다를 생업의 터로 사는 사람들에게 풍어와 무사 귀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이었다.

서산의 전통 풍어제인 ‘창리 영신제’가 이곳 창리에서 열리는 이유도 다름 아니다. 음력 정월 초삼일이면 주민 100여 명이 모여 창리 영신당에서 풍어제를 열었다. 지금도 그 전통이 이어지는 ‘창리 영신제’는 마을 어민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조기잡이 신으로 일컬어지는 임경업 장군을 당신(堂神)으로 제례를 올리는 행사다.

제당은 상당과 하당으로 구분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상당은 마을 북서쪽에 있었으며, 산신을 모시는 산신당과 산의 중앙에는 돌로 계단을 쌓고 철마상이 봉안돼 있었다. 하당은 지금도 영신제를 치르는 영신당으로 동북쪽 해안의 당산에 있다.

영신당 내부에는 임경업 장군과 그의 부인을 그린 화상이 걸려 있으며, 화상 밑에 장군 신위, 부인 신위라고 쓰인 위패가 안치돼 있다.

영신당은 1911년 선주들이 세웠으나, 이를 허물고 1996년 서산시의 지원에 힘입어 다시 지었다. 또 마을 입구에는 장승 2개가 있었는데 1983년 천수만 AB지구 간척사업으로 도로 공사를 하면서 산신당, 철마상과 함께 사라졌다.

당굿은 처음에는 마을 무녀가 주관했으나. 마을에서 무녀가 사라진 뒤로는 큰 무당을 불러서 굿을 했다. 중선을 부리던 시절에는 돈깨나 풀어 무당 패를 불러 삼현육각을 펼치며 성대하게 치렀다. 지금은 창리영신제보존회를 중심으로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영신제만 지내고 있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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