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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성의 횡단여행] 에티오피아 코리안 빌리지에 밝은 빛을 주소서...

[전운성의 횡단여행] 에티오피아 코리안 빌리지에 밝은 빛을 주소서...

  • 기자명 전운성 횡단여행가
  • 입력 2022.10.0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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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성 횡단여행가,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명예교수
전운성 횡단여행가,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명예교수

[뉴스더원=전운성 횡단여행가] 모처럼 의암호수와 이어지는 춘천 공지천 산책에 나섰다.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잔잔한 호수는 속삭이듯 출렁인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구비치는 듯한 구름다리 위의 2층 팔각정 자리에 섰다. 앞에 보이는 우뚝 솟은 에티오피아 한국전참전기념비와 에티오피아의 전통 농촌가옥을 형상화한 기념관이 정겹게 다가온다.

이를 무심코 보다가, 1968년 5월로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춘천 시내 중고교생들은 종합운동장에 모여 하늘을 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검은 헬기 한 대가 운동장 한가운데 내렸다. 

우리는 일제히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폐하 환영’이라고 쓴 피켓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하일레 셀라시에, 잉카네나 메루’를 외쳤다. 황제는 춘천 의암호변의 에티오피아 참전기념탑 제막을 위해 당시 정일권 총리와 함께 이곳을 찾았었다.

춘천에티오피아 한국전참전기념비. (전운성)
춘천에티오피아 한국전참전기념비. (전운성)

황제는 반가운 모습을 보이며 바로 기념탑 제막식장으로 향하자, 우리는 교실로 돌아가 하던 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나중에 들은 얘기는 황제가 제막식을 하면서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보여 숙연한 분위기였다고 했다. 

그 후 반세기가 지나, 성인이 되어 에티오피아를 두어 번 찾아 여러 곳을 둘러보던 중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뜻을 기리는 참전기념비와 그들 가족과 그 후손들이 사는 코리안 빌리지를 찾았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던지 그간의 사정은 혼돈의 상태였다.  
   
왜냐하면, 황제는 한국을 떠나 6년째 되던 해인 1974년 공산주의자의 쿠테타로 폐위되어 감금되었다가 1년 뒤 전립선암으로 사망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의 암살설도 꾸준히 나돈다. 이러한 기억 속의 에티오피아는 늘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의 한국전참전기념비와 기념관. (전운성)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의 한국전참전기념비와 기념관. (전운성)

여기에서 기억해 두고 싶은 것은, 이러한 황제의 사망은 시바여왕과 솔로몬 왕과의 사이에 태어난 왕을 시작으로 225대 약 3000년간 이어진 세계 최장 왕조의 종말이었다. 이는 현재 최장의 일본왕 126대와 신라 56대, 고려왕조 34대 그리고 조선왕조 27대를 비교해 보면 얼마나 긴 왕조였는지 말해준다.

사실 셀라시에 황제는 전통적인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농지개혁을 시도한 인물이다. 이 나라 속담에 ‘현명한 소작농은 지주 앞에서 절대로 방귀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지주제의 농촌폐단이 연연세세 이어져 내려왔음을 보여 준다.

특히, 황제는 1950년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 당시 그의 황실근위대 병력 중 일부에 ‘강뉴’라는 이름을 주어 우리나라에 파병한다. 1951년 5월, 1만5000km나 되는 긴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한 강뉴부대는 1진에서 5진까지 연병력 6037명의 에티오피아군은 253번의 전투를 벌여 전승하는 용맹성을 발휘한다. 

그러나, 124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의 희생은 감내해야 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아디스아바바의 한국전쟁참전기념공원을 찾았다. 우선 참전기념비를 보는 순간 기념관과 주변 조각 전시물은 달랐지만, 우뚝 솟은 춘천의 참전기념비와  꼭 닮았다. 

참전기념비 앞에서 거수경례를 하는 한국전 참전 노병. (전운성)
참전기념비 앞에서 거수경례를 하는 한국전 참전 노병. (전운성)

사실 이때 같이 간 KTV의 현지 촬영팀은 얼마 남지 않은 생존 참전노병과의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지금 생각해도 알지도 못했던 나라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긍지와 패기는 쩡쩡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은 황제를 폐위시킨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세운 공산정권하인 1974-1991년 사이 17년간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이유로 온갖 박해를 견디어 온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국가원수 멩기스투는 공산주의에 총을 겨눴다는 이유로 에티오피아의 한국전 참전 자체를 숨기려 했다. 

그리고 그는 주요 산업과 금융기관 그리고 토지 및 도시민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집단농장을 만든다. 또한 그는 북한을 왕래하지만, 대기근까지 발생하여 국민들의 참혹한 생활광경이 영국 BBC를 통해 알려진다. 

뿐만 아니라, 멩기스투는 붉은 공포없이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며, 무차별적이고 공포적인 붉은테러라 불리는 엄청난 살해행위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중에  이때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붉은테러 순교자기념관이 설립된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보기 드문 최악의 학살자 중 하나로 불릴 정도였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우리나라는 고도경제성장을 이루어가던 시기였다.     

코리안빌리지 전경. (전운성)
코리안빌리지 전경. (전운성)

이런 생각을 하며, 농촌진흥청에서 파견 나온 조박사를 만나 코리안빌리지를 찾았다. 먼저 우리가 지원한 옷감과 카페트를 만드는 마을작업장으로 들어섰다. 어둠침침한 작업장 안에는 청색 작업복의 여인들이 옷감과 카페트를 짜고 있었다. 

이것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그들의 사정은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참전노병들의 긍지에 찬 모습과 작업장 입구 놓인 방명록에 남겨놓은 알만한 인사들의 방문 사인과 오버랩되고 있었다. 

이어 녹쓸어 비가 샐 것 같은 함석지붕으로 가득한 코리안빌리지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온 동네는 빈곤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와중에 다행이라 느낀 것은 도중에 만난 주민들의 미소와 초등학교를 방문하면서 미래를 긍정적으로 준비하는 그들의 모습이었다. 나아가 2050년 아프리카 1위의 경제대국이 되는 큰 그림을 그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밝은 빛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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