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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여행] 화성 ‘융건릉’ 무인석에 코가 없는 이유! 죽어서 왕이 된 남자 ‘사도세자’

[스토리텔링 여행] 화성 ‘융건릉’ 무인석에 코가 없는 이유! 죽어서 왕이 된 남자 ‘사도세자’

  • 기자명 임요희 여행작가
  • 입력 2021.10.02 00:00
  • 수정 2021.10.04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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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묻힌 ‘융릉’ 아들 정조가 묻힌 ‘건릉’
조선 왕실에서 가장 안타까운 주검이 잠든 곳
왕릉은 조선의 예술과 철학이 집대성된 곳

왕릉은 조선이 자랑하는 문화유산이자 현대인에게는 최고의 산책 코스다.
왕릉은 조선이 자랑하는 문화유산이자 현대인에게는 최고의 산책 코스다.

[뉴스더원=임요희 여행작가] 조선왕조는 519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을 이어오며 역사에 길이 남을 건축문화, 기록문화를 남겼다. 또한 조선은 엄격한 유교국가로 왕릉을 건설해 선왕을 추모하고 왕실의 권위를 드러냈다. 

왕릉은 조선이 자랑하는 문화유산이자 현대인에게는 최고의 산책 코스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10월, 조선왕조의 품위와 자연의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룬 왕릉을 거닐며 사색에 잠겨보자. 

특히 화성 융건릉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나란히 잠든 곳으로 정조의 효심과 신도시 건설에 대한 그의 야망도 함께 살펴볼 수 있어 올 가을 스토리텔링 여행지로 추천된다. 

융건릉은 시민의 나들이 장소로 사랑받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융건릉은 시민의 나들이 장소로 사랑받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사도세자와 아들 정조가 나란히 묻힌 융건릉

경기도 화성시의 8가지 볼거리 ‘화성8경’ 가운데 으뜸이 융건릉이다. 융건릉은 융릉과 건릉을 함께 부르는 이름으로, 융릉에는 비운의 사도세자(추존 장조)와 혜경궁 홍씨(추존 헌경왕후)가, 건릉에는 22대 임금 정조와 효의왕후가 잠들어 있다.  

병점역 후문에서 버스로 10분 남짓 이동하면 융건릉관광안내소에 다다르게 된다. 입구에 노점과 카페, 편의점 등이 자리 잡고 있어 여느 관광지 못지않은 활기가 느껴진다.

융건릉은 외형만 거창한 왕릉이 아니라 시민의 나들이 장소로 사랑받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능역은 한양성 서대문 밖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조선왕릉 대부분이 서울 혹은 수도권에 존재하는 이유다.

조선의 왕은 제사 전에 재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대기해야 했다.
조선의 왕은 제사 전에 재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대기해야 했다.
왕릉은 매장지 외에 의례를 위한 다양한 부속 건물을 포함하고 있다.
왕릉은 매장지 외에 의례를 위한 다양한 부속 건물을 포함하고 있다.

조선의 예술과 철학이 집대성된 ‘왕릉’

융건릉 입구에서 관광객을 맞아주는 한옥은 재실(齋室)이다. 재실은 제사에 쓸 향과 제기를 보관하고 의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조선의 왕은 제사 전에 재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대기해야 했다. 재실은 원칙적으로 봉분에서 200~300m 떨어진 동남쪽에 위치하도록 정해져 있으며 단청 없이 민도리 양식을 따른다.

왕릉에는 매장지만 있는 게 아니라, 의례를 위한 준비실, 비각, 수라간, 정자각 등 다양한 부속 건물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봉분 주변에도 인물, 동물이 조각된 석물 장식이 놓여 있다. 조선왕릉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조선이 건축, 문화, 철학이 집대성된 거대한 예술작품이다. 

융릉의 모습. 정조는 오른 지 13년 되던 해 지금의 자리로 사도세자의 묘를 옮겼다.
융릉의 모습. 정조는 오른 지 13년 되던 해 지금의 자리로 사도세자의 묘를 옮겼다.

사도세자, 후손에 의해 황제로 추존되다

어느 쪽을 먼저 관람해도 상관없지만 먼저 지어진 융릉부터 들르는 게 순서다. 융릉은 사도세자(1735~1762)의 능이다.

사도세자가 처음부터 이곳에 묻힌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최후를 맞은 사도세자는 동대문구 배봉산 기슭에 버려지듯 묻혔다.

사도세자의 묘에는 수은묘(垂恩墓)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 삼육보건대학 뒤뜰이 그곳으로 묘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정조는 1789년 보위에 오른 지 13년 되던 해 지금의 자리로 사도세자의 묘를 옮겼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역을 현륭원(顯隆園)으로 추존했는데 ‘원’은 세자의 묘를 일컫는다. 

현릉원이 왕의 무덤을 뜻하는 ‘릉’으로 격상된 것은 고종에 이르러서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사도세자를 황제로 격상시켰다. 비운의 왕자 사도세자는 먼 후손에 의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대되었다.

화성능행도병풍. 정약용은 한강에 배다리를 놓아 정조가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했다. ⓒ국립고궁박물관
화성능행도병풍. 정약용은 한강에 배다리를 놓아 정조가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했다. ⓒ국립고궁박물관

해마다 아버지의 묘역을 찾은 정조의 효심

아버지의 묘역을 화산(華山)으로 천장한 정조는 해마다 참배를 왔다. 서울 창덕궁에서 화성 융릉까지 거리는 59.2㎞. 결코 짧지 않은 이 길을 지나며 정조는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정조는 능행길에1만3000건이 넘는 민원을 처리했다고 한다. 

어버이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두루 갖춘 정조는 개혁 군주이기도 했다. 1794년 1월, 보위에 오른 지 18년째 되던 해 정조는 꿈의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마음 먹고 화성 축성에 들어갔다. 수원화성을 상업 거점도시, 남쪽의 요새로 만들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묘역을 화산으로 옮긴 것도 그의 큰 그림에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화성이 완성되려면 적어도 10년이 걸릴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공사는 2년 만에 끝났다. 정약용이 거중기라는 기계를 고안해 공기가 단축시켰기 때문이었다. 화성이 완성되자 정조는 성내에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주둔시켰다. 장용영의 군사의 수는 3000명에 달했다. 

정사각형의 배위 ‘어배석’. 제례의식 전에 왕은 이곳에서 선왕께 절을 올린다.
정사각형의 배위 ‘어배석’. 제례의식 전에 왕은 이곳에서 선왕께 절을 올린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공존하되 동선을 공유하지 않는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공존하되 동선을 공유하지 않는다.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었던 아들

정조(1752~1800)는 오래 살지 못했다. 49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보위에 오른 지 24년째 되던 해였다.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미완으로 남았다. 

그의 사후에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수은 중독이 직접적인 사인이라는 것이다. 생전에 정조는 종기로 고생했는데 연훈방이라는 수은 치료법을 받았다. 수은 치료를 주도한 사람은 정조에게 적대적인 노론의 벽파였다. 

정조는 아버지 곁에 묻히길 원했다. 처음에 건릉(健陵)은 융릉 동남쪽에 마련되었다. 그러나 1821년 부인인 효의왕후가 승하하면서 대신들 사이에 이곳이 흉지라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에 융릉의 서쪽인 지금 위치로 천장하여 두 분을 합장했다.

정조가 처음 묻혔던 초장지는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러던 2011년 발굴조사를 통해 초장지의 위치가 드러나게 되었고 도자기, 편종 등 정조의 부장품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한동안 문화재청은 이곳을 접근 금지구역으로 묶어 두었다. 

비밀의 숲이 개방된 것은 최근의 일로 문화재청은 2020년 가을부터 관람을 허락하고 있다. 20분 거리의 초장지 숲길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선지 참나무 빛이 유난히 푸르고 서늘하다.

금천교는 신성한 구역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금천교는 신성한 구역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성스러운 공간으로 진입하기 위한 의례

비밀의 숲 ‘초장지’가 끝나는 곳에 폭이 좁은 개울이 자리 잡고 있다. 개울은 정결, 속죄를 뜻한다. 이 개울에서 속세의 티끌을 말끔하게 씻어낸 뒤 성스러운 구역으로 들어서라는 의미다.

개울에는 금천교가 놓여 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왕릉 구역이다. 금천교는 궁궐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단순한 정원 인테리어가 아니라 방문객에게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융릉에 있는 금천교의 이름은 ‘융릉교’이다. 

융릉교 서편으로 원형 연못 ‘곤신지’가 자리 잡고 있다. 조선왕릉에서 원형의 연못은 매우 귀한 존재이다. 사도세자가 묻힌 산이 화산(華山)인데 봉우리와 봉우리가 능을 둘러싼 모양새가 마치 한 송이 꽃과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한편 화산은 똬리를 튼 용의 형세이기도 하다. ‘곤신지’는 용이 입에 물고 있는 여의주를 상징한다. 용에게 힘차게 날아오르라는 의미로 둥근 연못을 판 것.

금천교를 넘어서면 홍살문이 나타난다. 홍살문의 붉은 색과 화살 문양은 악귀를 막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홍살문 형태의 관문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도 볼 수 있는데 중국의 ‘폐방’, 일본의 ‘토리이’, 태국의 ‘사오칭차’가 그것이다.

금천교, 홍살문 등 겹겹의 통과의례를 거쳐 제향공간으로 접어들면 사각형의 널따란 배위가 나타난다. 이 바위는 조선의 임금이 선왕을 향해 절을 올리던 곳이다. 판위 혹은 어배석으로 불린다. 

동쪽 언덕에 배치된 건물은 비각이다. 비각 안에는 두 기의 표석이 있다.
동쪽 언덕에 배치된 건물은 비각이다. 비각 안에는 두 기의 표석이 있다.
비각에는 여러 개의 총탄 자국이 나 있다. M16을 쏜 자리.
비각에는 여러 개의 총탄 자국이 나 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생긴 총탄 자국. 크기가 작은 것으로 보아 권총 자국이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생긴 총탄 자국. 크기가 작은 것으로 보아 권총 자국이다.

 비각에 새겨진 동족상잔의 흔적

능침 앞으로 정자각(丁字閣)이 자리 잡고 있다. 정자각은 제례 행위의 중심건물로 ‘丁’자 형태로 지어져 이런 이름이 붙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향로와 어로로 이어져 있다. 좌측이 향로고, 우측이 어로다. 

향로는 죽은 자를 위한 길이고, 어로는 산 자를 위한 길이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공존하되 동선을 공유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관람객은 어로에는 올라서도 되지만 향로를 밟아서는 안 된다. 산 자는 정자각에서 제례를 모신 뒤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죽은 자는 정자각을 통과하여 능침으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향로 서쪽에 마련된 건물은 수라간이며, 멀리 동쪽 언덕에 배치된 건물은 비각이다. 비각 안에는 두 기의 표석이 있다. ‘조선국 사도장헌세자현륭원’이 먼저 세운 것이고, ‘대한 장조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는 나중에 고종이 세운 것이다. 

비각에는 여러 개의 총탄 자국이 나 있다. 작은 것은 권총의 흔적이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생긴 것들이다. 왕릉은 조선 왕실의 역사는 물론 동족상잔의 아픔마저 담고 있다. 

능침구역 무인석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코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능침구역 무인석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코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인석 코를 만지면 아들을 얻는다?

정자각 뒤편은 능침구역이다. 다양한 석물이 놓여 있고 문인석, 무인석이 마주 보고 있다. 자세히 보면 금관조복을 갖춰 입은 무인석의 코가 없다.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닳아 없어진 것인데 과거에는 왕릉의 무인석 코를 만지면 아들을 얻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지금은 딸이든 아들이든 그저 공부 잘해서 자식이 좋은 대학 가는 게 부모의 꿈이지만 그때만 해도 무인의 기상을 타고난 용맹한 아들을 두는 게 부모들의 하나같은 소망이었던 것이다.

능침구역을 눈여겨보면 봉분을 떠받치고 있는 능원이 파도를 타듯 굴곡을 지닌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흐트러지는 기를 모으고, 맺힌 기를 풀어주면서 기의 완급을 조절하려는 풍수사상의 반영이다.

융릉에서 건릉으로 가는 길에 야생초 화단이 숨어 있다. 아늑하기가 꼭 어머니 품에 든 듯 하다. 왕릉 구역만 아니라면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자리 잡으면 딱 좋은 곳이다. 뜨거운 커피를 한 잔을 시켜 놓고 하염없이 머물다 오고픈 마음이 드는 곳. 

남한에는 총 44기의 왕릉이 있고 그중 40기가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왕릉의 가치는 땅의 지세를 반영한 자연조화적 조영물이라는 데 있다.

최근 왕릉을 둘러싸고 문화재청과 건설사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 것도 고층아파트의 콘크리트 벽이 왕릉이 지닌 조화성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건릉의 모습.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 정조의 꿈은 미완으로 남았다.
건릉의 모습.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 정조의 꿈은 미완으로 남았다.
융건릉 취재에 이덕규 시인(오른쪽)이 큰 도움을 주셨다. 
융건릉 취재에 이덕규 시인(오른쪽)이 큰 도움을 주셨다. 

조선 왕실에서 가장 안타까운 주검이 잠든 곳

혜경궁 홍씨(1735~1816)는 9세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뜰 때까지 71년을 궁에서 보냈다.

남편이 그 아버지의 손에 죽는 것과, 아들이 숱한 견제를 물리치고 왕이 되는 것과, 그 아들이 세상을 뜨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손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도 보았다. 

헤경궁 홍씨는 군주의 살아 있는 생모였지만 대비가 아니었기에 자궁(慈宮)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그녀는 왕실의 어른으로 살면서 궁중문학의 효시인 『한중록』을 저술했다.

한 많은 세월을 살아낸 혜경궁 홍씨는 죽어 남편과 합장되었다. 순조 15년의 일이었다. 

사연 없는 죽음이 없겠지만 융건릉에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안타까운 주검들이 잠들어 있다.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자식, 그 곁에는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자식이 묻혀 있다.

왕실에서 태어났기에 누구보다 많은 권세와 영화를 누렸지만 그만큼 뼈아픈 삶을 살다 간 이들이다. 그들의 삶과 죽음을 추모하며 융건릉을 걸을 일이다.  

이번 융건릉 취재에 화성이 낳은 시인, 이덕규 구름공장 공장장님이 큰 도움을 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한옥과 소나무의 멋진 어우러짐. 혜경궁 베이커리는 한국식 문화공간이다.
한옥과 소나무의 멋진 어우러짐. 혜경궁 베이커리는 한국식 문화공간이다.
한눈에 봐도 대충 지어진 한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혜경궁 베이커리 내 한옥.
한눈에 봐도 대충 지어진 한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혜경궁 베이커리 내 한옥.

빵집이라고요? 문화공간입니다 ‘혜경궁 베이커리’

화성 보통리저수지에 자리 잡고 있는 ‘혜경궁 베이커리’는 단순한 카페, 빵집을 넘어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백화가 만발한 뜨락에서 펼쳐지는 라이브 공연은 이곳을 찾은 또 하나의 이유이다. 

헤경궁 베이커리는 이용호 (주)휴랜드 회장의 숙원사업이다. 그는 저수지 주변 3만 평 부지에 전통한옥을 짓고 꽃동산, 나무동산을 만들었다.

이곳에 심어진 나무의 가격만 40억 원대를 호가한다고 한다. 특히 압도적인 3층짜리 주건물과 어우러진 앞마당의 소나무는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다. 

일주일에 2만 명 이상이 이곳을 찾고 있지만 혜경궁 베이커리는 여전히 공사가 진행 중이다.  동산 곳곳에 여러 채의 한옥이 지어지고 있다.

관리감독을 맡은 이는 서대환 대목장. 눈이 밝은 분들은 알겠지만 전통에 입각한 방식으로 심혈을 기울여 한 채 한 채 완성해가는 중이다.

전체 경관이 완성되려면 앞으로 10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현재는 코로나로 인해 내국인 위주로 방문하는 중이지만 장차 한국식 쉼터로서 한류 대열에 합류할 것으로 전망된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자연산 전어회는 보기만 해도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자연산 전어회는 보기만 해도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가을 최고의 보양식 ‘전어회’

가을 음식 중 전어를 따라올 만한 게 있을까? 은백색으로 빛나는 자연산 전어회는 보기만 해도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전어는 맛도 좋지만 몸에 좋은 불포화지방산이 가득하다. 입안 가득 퍼지는 전어회 고소한 맛의 비밀이 바로 이 불포화지방. 

다만 전어 같은 붉은살 생선은 호흡에 많은 양의 산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수조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만큼 전어회는 가을에 잠깐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다.

화성 궁평항 신서해횟집에서 주말에 한해 전어회를 판매하고 있다. 1kg에 4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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