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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여행] 대전차기지와 아파트가 한 건물에? 도봉구 ‘다락원 터’와 ‘창포원’

[스토리텔링 여행] 대전차기지와 아파트가 한 건물에? 도봉구 ‘다락원 터’와 ‘창포원’

  • 기자명 임요희 여행작가
  • 입력 2021.11.13 00:00
  • 수정 2022.10.2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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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서울을 사수하라! 경흥대로에 쌓은 방호벽
분단의 상징에서 화합과 평화의 공간으로
오밀조밀 다채롭게 구획된 도시정원 ‘창포원’

서울대전차기지가 공간 재생 붐을 타고 문화예술공간인 ‘평화문화진지’로 재탄생했다.(임요희)
서울대전차기지가 공간 재생 붐을 타고 문화예술공간인 ‘평화문화진지’로 재탄생했다.(임요희)

[뉴스더원=임요희 여행작가] 군사시설인 대전차방호시설과 아파트가 한 건물에 있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조합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 기이한 시설물은 수도 서울에 그것도 35년간이나 존재했다. 

지하철 1, 7호선 도봉산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오면 큰길 건너편에 도봉환승센터가 있다. 환승센터 앞으로 자그마한 표지석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 표석 명이 ‘다락원 터’다. 이 다락원 터와 대전차방호시설 사이에는 들으면 들을수록 기막힌 이야기가 숨어 있다.  

북방의 장사치들은 동해에서 잡아들인 명태를 오일장에 맞춰 다락원으로 가지고 왔다.(임요희)
북방의 장사치들은 동해에서 잡아들인 명태를 오일장에 맞춰 다락원으로 가지고 왔다.(임요희)
도봉시민아파트 1층은 육중한 탱크가 여러 대 자리 잡고 있었던 대전차기지였다.(임요희)
도봉시민아파트 1층은 육중한 탱크가 여러 대 자리 잡고 있었던 대전차기지였다.(임요희)

함흥차사가 걸었던 길 ‘경흥대로’

‘다락원 터’ 표석에는 ‘조선시대 사상도고(私商都賈)들이 북방어물을 매점하는 등 상업활동을 하던 곳’이라는 문안이 적혀 있다. 사상도고란 상품을 매점매석해 가격 상승을 노리는 장사치들로 조선 후기에는 함경도에서 내려온 어물이 매점매석의 대상이었다. 

다락원이 무역의 요지로 자리 잡게 된 데는 지형적 특수성 덕이 컸다. 다락원 터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깎아지를 듯 높은 도봉산(740m)이, 동쪽으로는 중랑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중랑천 뒤쪽으로는 수락산(638m)이 우뚝 버티고 서 있다. 

그렇다. 다락원 터는 산과 강, 산과 산 사이에 존재하는 좁은 평야였다. 이 길만 따라가면 산을 넘지 않아도, 물을 건너지 않아도 북쪽지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 길의 이름은 ‘경흥대로’.

경흥대로는 동대문에서 출발해 두만강 하구의 경흥 지방에까지 이르렀다. 현재 의정부, 남양주, 포천, 철원을 지나는 43번 국도가 이 길과 일치한다.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설득하기 위해 차사를 파견했다. 차사는 경흥대로를 따라 함흥으로 올라갔다. 그러곤 감감무소식. 이성계는 태종이 보낸 차사를 살려 내려보내지 않았다. 함흥차사는 소식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다락원 터 서쪽에는 해발 740m의 도봉산이 버티고 있다.(임요희)
다락원 터 서쪽에는 해발 740m의 도봉산이 버티고 있다.(임요희)
다락원 터 동쪽에는 해발 638m의 수락산이 버티고 있다.(임요희)
다락원 터 동쪽에는 해발 638m의 수락산이 버티고 있다.(임요희)
다락원 터와 수락산 사이를 파고드는 중랑천 물길.(임요희)
다락원 터와 수락산 사이를 파고드는 중랑천 물길.(임요희)

북방의 명태가 거래되던 ‘다락원’

사람은 이 길을 따라 북으로 올라갔지만 명태는 이 길을 따라 남으로 내려왔다. 명태는 함경도 원산이 주산지였다. 북방의 장사치들은 동해에서 잡아들인 명태를 오일장에 맞춰 다락원으로 가지고 왔다. 남쪽의 사상들은 돈다발을 싸 짊어지고 기다리다가 갓 도착한 명태와 바꾸었다.

다락원을 한자로 누원(樓院)이라고 한다. 누(樓)는 누각을 뜻한다. 원(院)은 조선 시대 공무로 파견된 관리가 잠도 자고 밥도 먹는 숙박시설이었다. 사실 관리들은 오다가다 어쩌다 묵는 수준이었고 공실을 메우는 것은 경흥대로를 따라 여행하던 백성들이었다. 

일개 작은 여관이었던 다락원 일대가 수산물 거래소로 탈바꿈하면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 그들을 상대하는 서비스업 종사자가 모여들었다. 주막거리가 형성됐고, 어물 외에도 다양한 물품이 거래되었다. 다락원은 함경도 말, 강원도 말, 서울말이 뒤섞이는 복합상업지구로 성장했다.

겉에서 보면 평범한 아파트, 하지만 1층에는 대전차기지가 숨어 있다. 평화문화진지 안에 전시된 자료 사진
겉에서 보면 평범한 아파트, 하지만 1층에는 대전차기지가 숨어 있다. 평화문화진지 안에 전시된 자료 사진
지역문화자료집에는 1970년 도봉구 다락원 터에 건설되었던 대전차방호기지와 관련하여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다.(임요희)
지역문화자료집에는 1970년 도봉구 다락원 터에 건설되었던 대전차방호기지와 관련하여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다.(임요희)

경흥대로를 따라 남하한 북한군 전차

다락원의 몰락은 남과 북 사이에 38선이 그어지면서 찾아왔다. 원산으로 가는 길이 끊겼으니 화양영화도 끝이 났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이 기습 남침했다. 

휴전선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불과 45km. 북한군은 경흥대로를 따라 남하했다. 남침 당일, 동두천과 포천이 함락되었다. 다음 날인 26일에는 의정부가 뚫렸다. 북한군은 서울과의 거리를 점점 좁혀왔다. 

어떻게든 수도 서울을 지켜야 했던 국군은 도봉구 창동에 ‘창동저지선’을 구축했다. 창동저지선은 서울 최후의 방어선으로 경흥대로가 지나는 길목이었다. 국군은 사력을 다해 방어에 나섰지만 27일 아침 창동저지선마저 힘없이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단 사흘 만에 서울의 관문이 뚫린 것이다. 

북한군이 서울이 입성했다는 소식에 국군은 시가전을 포기하고 28일 새벽, 성급하게 한강인도교를 끊었다. 전쟁은 3년간 계속되었다. 

김신조 사건에 충격받은 정부는 경흥대로가 지나는 서울 최북단 도봉구 다락원 터에 대전차방호시설을 건립했다.(임요희)
김신조 사건에 충격받은 정부는 경흥대로가 지나는 서울 최북단 도봉구 다락원 터에 대전차방호시설을 건립했다.(임요희)

요새가 된 다락원 터  

1968년 북한의 무장간첩단이 청와대 300m 앞까지 침투하는 김신조 사건이 발생했다. 패닉에 빠진 대한민국 정부는 휴전선 목책을 전부 철조망으로 바꾸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주민등록증을 발급하는 일에 들어갔다. 

수도 방비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정부와 국군은 경흥대로가 지나는 서울 최북단 도봉구 다락원 터에 대전차방호시설을 건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들은 창동저지선이 맥없이 뚫리면서 수도 서울이 함락된 아픔을 기억하고 있었다. 

1970년 완공된 대전차방호시설은 겉으로 보면 4층짜리 평범한 아파트였다. 하지만 이 건물은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었는데 2층에서 4층까지는 군인 가족 180세대가 거주하고, 1층에는 군사시설을 배치하여 유사시 바로 전투에 임하도록 했다. 

불가피할 경우 건물을 폭파하여 북한군 전차가 서울 시내로 진입하는 것을 막도록 설계되었다. 다락원 터는 요새화되었다.  

건물 상단은 안전진단 E등급을 받아 철거되었고, 1층에 있던 군사시설만 존치가 결정되었다.(임요희)
건물 상단은 안전진단 E등급을 받아 철거되었고, 1층에 있던 군사시설만 존치가 결정되었다.(임요희)

35년 만에 철거된 도봉시민아파트

35년이 지나 도봉시민아파트 대전차방호시설은 파괴되었다. 북한군 때문이 아니라 시설이 낡고 노후해서다. 건물 상단은 2004년, 안전진단 E등급을 받아 철거되었고, 1층에 있던 군사시설만 존치 처분을 받았다. 

그 상태로 ‘서울대전차진지’는 10년간 방치되었다. 무너진 것도 아니고 안 무너진 것도 아닌, 없앤 것도 아니고 보존된 것도 아닌 폐허는 도시의 흉물이 되어 갔다. 깔끔하게 밀어내고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는 사람, 멋진 박물관을 지어야 한다는 사람. 설왕설래 말이 많았다. 

2017년이 되어서야 골치덩이 시설물은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다. 도시재생 붐을 타고 문화예술공간인 ‘평화문화진지’로 재탄생한 것이다. 

평화문화진지는 예술작가들의 소중한 작업실, 시민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 중이다.(임요희)
평화문화진지는 예술작가들의 소중한 작업실, 시민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 중이다.(임요희)
평화문화진지 일대를 발아래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임요희)
평화문화진지 일대를 발아래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임요희)

세련미와 폐허미의 조화 ‘평화문화진지’

도봉산역 2번 출구는 ‘평화문화진지’와 바로 연결된다. 평화문화진지는 3개의 건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건물에는 시민동과 창작동이, 두 번째 건물에는 평화광장과 문화동이 배치되었다. 세 번째 건물은 예술동이다.

평화문화진지는 문화예술작가들의 소중한 작업실, 전시실 공간으로 쓰이는 한편, 시민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평화문화진지는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건물 앞쪽의 파사드는 따뜻한 질감의 나무 건축물로 누가 봐도 단정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반면 건물 뒤편의 존치 시설물은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 계단과 벽체가 힙한 폐허미를 발산한다. 둘 다 평화문화진지의 얼굴이다. 뒤편은 과거의 얼굴이고 앞면은 현재의 얼굴이다.   

평화문화진지 뜨락에 전시된 베를린 장벽 일부.(임요희)
평화문화진지 뜨락에 전시된 베를린 장벽 일부.(임요희)

건물 외부에도 볼거리가 많다. 평화문화진지 뜨락에 베를린장벽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진짜 베를린에서 가져온 장벽이다.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것은 1961년. 도봉구 대전차방호시설보다 9년 앞선다. 시민들이 서구로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독에서 건설했다. 그들은 베를린장벽을 ‘반 파시스트 보호벽(Antifaschistischer Schutzwall)’이라고 불렀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것은 1989년의 일이다. 30년 만에 완전히 해체된 베를린장벽은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월스트리트저널의 발표에 따르면 현재 40개국 237개 장소에서 보관 전시 중이라고 한다. 

3피스의 베를린장벽은 폐허가 된 대전차방호벽과 제법 잘 어울린다. 한때는 분단과 대립을 상징하던 시설물이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공통점이 있다. 한국에는 언제쯤 완전한 평화의 날이 찾아올까. 

2009년 개장한 창포원은 서울을 대표하는 생태정원이다.(임요희)
2009년 개장한 창포원은 서울을 대표하는 생태정원이다.(임요희)
창포원 내 ‘붓꽃원’에는 130종의 다양한 붓꽃 30만 본이 식재되어 있다.(임요희)
창포원 내 ‘붓꽃원’에는 130종의 다양한 붓꽃 30만 본이 식재되어 있다.(임요희)

오밀조밀 다채롭게 구획된 도시정원 ‘창포원’ 

평화문화진지 전망대(20m)에 오르면 서쪽으로는 도봉산이, 동쪽으로는 수락산이 잡힐 듯하다. 도봉산과 수락산에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중랑천이다. 발아래로는 평화문화진지, 다락원체육공원, 창포원이 낮게 엎드려있다. 

2009년 개장한 창포원은 생태공원으로 분류되지만 잘 만든 정원처럼 아기자기해서 ‘도시정원’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곳이다. 

다양한 요소로 오밀조밀 구획된 공간에는 붓꽃원, 꽃창포원, 억새원, 소나무언덕, 부들원 등 12개의 테마구역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붓꽃원에는 130종의 다양한 붓꽃 30만 본이 식재돼 있어 ‘창포원’ 이름값을 한다.

‘도봉학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나호열 소장.(임요희)
‘도봉학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나호열 소장.(임요희)

창포원은 5, 6월 붓꽃(Iris)이 필 무렵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데 가을날의 풍경도 봄 못지않게 장관이다. 수천, 수만의 꽃과 나무가 자기 색깔을 찾아 물드니 한 폭의 그림을 방불케 한다. 

공원 옆에는 두 대의 전차가 전시되어 있다. 하나는 캐터필러를 장착한 대형 전차이고, 다른 하나는 바퀴로 움직이는 경량 전차이다. 두 대의 전차는 태생이 전쟁무기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위기감이 제거되어 있다. 

전쟁이란 게 마치 먼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인 듯 분위기가 무심하다. 평화문화진지의 설계자가 두 대의 탱크를 꽃동산 옆에 배치한 것은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라는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평화문화진지 취재에 전 경희대학교 철학교 교수이자 ‘도봉학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나호열 소장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도봉산 등산로 가는 길에 두부골목이 형성되어 있다.(임요희)
도봉산 등산로 가는 길에 두부골목이 형성되어 있다.(임요희)
걸쭉한 막걸리 한 잔, 고소한 두부 한 점이 마음의 허기까지 달래줄 것이다.(임요희)
걸쭉한 막걸리 한 잔, 고소한 두부 한 점이 마음의 허기까지 달래줄 것이다.(임요희)

도봉산 먹거리촌에서 만나는 두부 요리

도봉산역 1번 출구에서 도봉산 등산로 가는 길에 대단위 먹거리촌이 형성되어 있다. 고깃집부터 칼국수집, 해물요리집, 보리밥집, 포차 등 없는 것이 없다. 주말이면 이곳은 등산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도봉산의 산세가 아름답고 접근성이 좋다 보니 그만큼 등산객 수도 많다.

콩 산지도 아닌 이곳에 두부집이 모여 있는 데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힘든 산행을 마치고 들이켜는 막걸리 한 잔은 꿀맛이다. 막걸리 하면 두부김치! 막걸리와 궁합이 맞는 안주 위주로 식당을 차리다 보니 두부집이 늘어나게 된 것이리라.  

이번 주말에 평화문화진지를 찾는다면 따끈따끈 김이 오르는 두부골목에서 아삭한 배추, 매콤한 배추속이 곁들여지는 두부보쌈(30,000원) 한 접시를 시켜보자. 걸쭉한 막걸리 한 잔, 고소한 두부 한 점이 마음의 허기까지 달래줄 것이다. 

■평화문화진지 안내
주소: 서울시 도봉구 마들로 932 (1, 7호선 도봉산역 2번 출구)
운영시간: 09:00 ~ 18:00 (월요일, 공휴일, 명절 당일 휴관)
입장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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