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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린의 옴니버스 칼럼] 여름 밤

[이형린의 옴니버스 칼럼] 여름 밤

  • 기자명 이형린 동화작가
  • 입력 2022.08.13 00:00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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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린 동화작가
이형린 동화작가

[뉴스더원=이형린 동화작가] 올바른 절차

친구와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아홉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여전히 덥다.

까무잡잡한 남자가 기타를 치며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왜 사람들도 별로 없는 이 시간에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더위 때문이구나. 해가 지지 않으면 노래는커녕 길거리에 서 있기도 힘든 요즘이다.

기타 가방 안에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이 들어 있다. 친구에게 말도 없이 가방을 뒤적여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난 가난해서 만 원짜리를 턱턱 건네주지 못한다.

내가 기타 가방에 돈을 넣고 오는 동안 친구가 서서 기다린다. 내가 친구 곁으로 오니 친구는 자연스럽게 가던 길로 몸을 튼다. 친구의 팔을 잡았다.

"노래 듣고 가야지. 적선을 하는 게 아니잖아."

까무잡잡한 남자 앞에 있는 (아마 차량 통제를 위해 있는 것 같은) 돌에 앉았다.

"앉아."

친구도 옆에 앉았다. 더워도 너무 더운 날이라 관객은 둘뿐이다. 미치도록 좋지도 그 시간이 아깝지도 않은 꽤 적당히 좋은 노래다. 노래가 끝났다. 박수를 쳤다. 남자가 아주 조금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우리 인사를 꾸벅하곤 그 자리를 떠났다. 노래는 또 시작되겠지.

친구가 말했다.

"넌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게 뭔지 아는 것 같아."

"어? 뭐가."

"노래 다 듣고 오자고 하는 거보면."

"우리 적선을 하는 게 아니니까. 노래를 들어줘야지."

며칠 전 이 일이 떠오른 건, 따지고 보면 전혀 다른 오늘의 생각 때문이다. 하루 종일 그 생각을 했다.

형식적인 절차, 적법한 절차 말고 올바른 절차가 좋다는 생각. 아마도 내게는 고생하는 까무잡잡한 남자의 기타 가방에 돈을 넣은 다음 꼭 노래를 듣고 가는 게 올바른 절차인 모양이다. 갑자기 그 날 일이 떠오르는 것 보니 말이다.

요즘 애

휴가다 캠프다 동아리 모임이다 나보다 바쁜 청소년들이 결석을 했다. 지난주에 휴가를 갔다 온 명랑청소년 혼자만 학원에 왔다. 그 말인즉슨 녀석과 내가 수업을 제쳐두고 또 노가리를 깔 거란 뜻이다.

"글은 왜 안 쓰세요?"

"안 써져서. 내가 내로라하는 창의력 부족인 사람이라."

"모의고사 영어 지문 중에 그런 내용이 있었는데요. 어떤 작가가 책을 쓰다가 어느 순간 창의력이 바닥이 나서 도저히 글을 더 쓸 수가 없었데요. 그래서 그 책을 멈추고 2년 동안 다른 글들을 썼데요. 2년이 지나고 나서 다시 그 책을 봤더니 막 창의력이 폭발했데요. 그래서 멋진 책을 완성했데요. 그 문제의 답은 무언가가 막힐 땐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나면 다시 창의력이  폭발하는 때가 온다는 거죠. 휴식이 필요한지도 몰라요."

"난 너무 휴식만 취하고 있어."

"하하하."

얼렁뚱땅 수업을 끝내고 나란히 학원을 나왔다. 꼼꼼한 녀석이 말한다.

"에어컨 끄셨어요? 학원 폭발시키지 말구요."

"엉. 껐어."

복도만 나와도 열기가 가득하다. 시원한 음료수가 절실했다.

"뭐 마실래?"

"아뇨. 괜찮아요."

"아. 그냥 사준다고 할 때 먹어. 집에 가서 아 사달라고 할 걸 하고 후회하지 말고."

"히히. 네 그럼 쇼콜라라떼요."

음료수를 얻어먹은 게 맘이 쓰였는지 명랑청소년은 사거리까지 바래다주었다. 사거리에서 꾸뻑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녀석을 보면 생각했다.

요즘 애들 어떠네 저떠네 해도 저 쇼콜라라떼를 쪽쪽 빨아먹고 가는 청소년은, 열일곱 살의 나보다 훨씬 낫다.

아빠의 아내.

이제 아이라고 부르기엔 커버린 열일곱 살의 소녀는 새엄마가 생겼다고 한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아이의 말은 거짓말인걸 알고 있다. 열네 살 생일 날 아침, 아이의 엄마는 집을 나갔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종교에 빠진 엄마는 집을 나가기 전날 밥하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했다.

작년 여름 엄마의 마지막 전화를 받고 아이는 많이도 울었었다. 미안하단 소리도 안하더라며 아이는 울고 또 울었다. 그래도 엄마를 미워하진 말라고 말 했었다. 그럼 네가 더 다친다고.

그리고 그해 가을 아이의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그건 아이와는 아무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의 아빠가 매일 웃는다고 한다. 일곱 살 밖에 안 된 어린 동생은 벌써부터 아줌마를 엄마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는 화가 났다. 너무 빨리 엄마를 잊는 것 같다고 했다. 본지 한 달밖에 안된 아줌마와 같이 사는 게 싫단다.

갑자기 이사를 가야하는 것도 싫고, 남이 쓰던 가구는 싫다는 새엄마 때문에 멀쩡한 가구를 다 버리고 가는 것도 싫단다. 왜 자기가 쓰던 책상까지 버려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화를 냈다. 아이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받아 들여라. 일곱 살 난 동생에겐 엄마가 필요하고, 몇 십 년을 사실 아빠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양보해야 한다면 2년 있으면 대학으로 떠날 니가 하는게 맞는 거다.

아줌마한테 너무 함부로 굴지마라. 안지 한 달 된 아줌마가 갑자기 엄마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네 아빠의 아내라는 걸 잊지 말아. 그만큼의 존중은 해야 한다. 그렇다고 다 이해하고 양보할 필요는 없다. 어린 것이, 어른이 아니란 것이 죄는 아니니까.

아이는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도 울지 않았다. 일 년 사이 아이는 훌쩍 자라 있었다. 아픈 아이는 빨리 자란다. 이제 아이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겠지.

내 콧잔등까지 시큰해졌다. 그냥 속상하겠구나 힘내라고 말할걸 그랬다. 나까지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아 맘이 안 좋다.

어젯밤

며칠째 숨 막히는 더위가 계속됐다. 그래도 밤에는 좀 견딜만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천천히 걸으며 엄마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한참을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저 앞에서 웬 고등학생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10시 반. 가방을 메고 걸어오는 아이는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아도 고3이란 게 티가 났다.

엄마와의 통화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눈에 들어왔던 건 혼자 중얼중얼 욕을 하며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도 내 신경을 건드리기에 충분한 상스러운 욕들이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녀석과 마주쳐 지나가기 직전이었다. 귓속으로 들려온 상소리에 인상이 찌푸려진 순간 녀석이 갑자기 팔꿈치를 들어 내 팔을 치고 지나갔다. 너무 놀라고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녀석은 날 힐끗 보더니 지나가 버렸다. 실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팔은 녀석이 지나가고 나서도 계속 아팠다.

난 걸음을 돌려 녀석을 쫓아갔다. 엄마의 이야기는 계속 되고 있었고 난 차마 끊지 못해 말없이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냥 녀석을 쫓아가고 있었다.

녀석도 그걸 알아챘는지 계속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았다. 가까이 가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것에 긴가민가했는지 녀석이 전봇대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내가 어쩌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난 엄마와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 모르는 척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는 녀석의 어깨를 잡았다.

"너 나한테 할 말 없니?"

"네? 뭐요?"

배시시 웃는 녀석의 표정이 내 뚜껑을 열었다.

그때부터 난 훈계라는 이름의 막말을 녀석의 얼굴에 흩뿌렸다. 말을 할수록 더 화가 났다. 내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는 걸 알고야 입을 다물었다.

녀석의 얼굴엔 웃음이 가셨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하고 있었다. 나 몰라라 도망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냥 그 자리에서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똑바로 행동하고 다니라는 말을 끝으로 녀석을 풀어줬다.

씩씩거리던 숨이 잦아들 때쯤 알았다. 내가 화가 나 있었다는 걸.

어딘가에서 화가 난 녀석은 우연히 지나가던 내게 화풀이를 했다. 화가 나고도 화가 난줄 몰랐던 난, 녀석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때 알았다.

요즘 내가 화가 나 있었다는 걸.

 

작가의 말: '쟤가 내 편이었으면 좋겠다.'하는 사람 말고, '쟤가 내 적이면 큰일 나겠다.'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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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동 2022-08-15 09:23:29
"우리 적선을 하는 게 아니니까. 노래를 들어줘야지."
참으로 저에게는 감동 으로 다가옵니다.소소하고 담담한 듯 하지만, 일상적 으로 바빠서,더워서...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지키기 힘든 올바른 절차 이겠지요. 감사합니다 좋은글
더워도 너무더운 날씨에 몸건강 잘챙기시고 매일 행복 하세요.
김희봉 2022-08-13 22:46:24
나도 서울에서 근무할때 지하철역에서 공연하는 무명가수들에게 공연료가 없어 들고있던 음료수를 건네주고 대신 박수를 열열히 처준적있는데 형린씨도 ㅎㅎ. 아빠의 아내를 읽고 이혼안하길 잘했구나 생각드네요. 아이들을 위해 남자의 인생을 포기하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