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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역사탐방] 한반도 고대왕국의 숨결이 살아있는 천년고도 남원 '아막성'

[기획: 역사탐방] 한반도 고대왕국의 숨결이 살아있는 천년고도 남원 '아막성'

  • 기자명 송미경 기자
  • 입력 2022.08.26 09:51
  • 수정 2022.09.2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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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고원 일대와 봉화산 산줄기를 따라 구축된 '고대의 요새'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영토쟁탈 중심지
고대왕국의 흔적 엿볼 수 있어...역사적으로 보존가치 높아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성리, 아영고원에 있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38호 아막성. (사진=송미경 기자)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성리, 아영고원에 있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38호 아막성. (사진=송미경 기자)

[뉴스더원=송미경 기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영토 쟁탈전이 본격화하고 대가야가 새로운 가야의 맹주로 떠오른 격동의 5세기, 이 때 대가야가 아영고원 일대에 쌓은 산성이 아막성이다.

아막성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38호로 전북 남원시 아영면 성리에 위치한 포곡식 산성이다. 봉화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 정상부와 주변 계곡을 수직으로 깎아내린 성벽으로 감싼 둘레 640m 규모다. 운봉고원 일대와 봉화산 산줄기를 따라 구축된 ‘고대의 요새’ 아막성을 만나보자.

아막성은 백두대간 일대의 고갯길을 통제할 수 있는 고대의 요충지였다. (사진=송미경 기자)
아막성은 백두대간 일대의 고갯길을 통제할 수 있는 고대의 요충지였다. (사진=송미경 기자)
북문터의 물이 흐르는 곳 동쪽에 위치한 지름 1.5cm의 돌로 쌓아 만든 원형의 우물터. (사진=송미경 기자)
북문터의 물이 흐르는 곳 동쪽에 위치한 지름 1.5cm의 돌로 쌓아 만든 원형의 우물터. (사진=송미경 기자)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정교한 요새

아막성은 해발 400m가 넘는 고원지대인 운봉고원의 치재·복성이재·복성이뒷재의 가운데에 위치해 백두대간 일대의 고갯길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고, 섬진강의 분지가 발원되는 곳으로 고대의 요충지였다.

성터는 둘레가 632.8m로 대체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 동·서·북문터가 남아 있다. 북변의 성벽은 완전체 형태로 보존돼 있으며, 네모 반듯하게 다듬은 돌을 가지런히 쌓아 정교함을 보여준다.

동쪽은 거의 직선으로 길이 147.1m이며 서쪽은 126.9m, 곡선을 이룬 남쪽은 208.1m이다.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기와 조각, 백제계의 도자기 조각들이 발견되고 북문터의 물이 흐르는 곳 동쪽에는 지름 1.5m의 돌로 쌓아 만든 원형의 우물터가 있다.

아막성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사이에 격렬한 영토 쟁탈전이 벌어졌고, 이 때 대부분이 파괴됐다. (사진=송미경 기자)
아막성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사이에 격렬한 영토 쟁탈전이 벌어졌고, 이 때 대부분이 파괴됐다. (사진=송미경 기자)

 백제와 신라의 영토쟁탈 중심지, 아막성

아막성은 소백산맥의 동서를 관통하는 요충지였으며 이곳을 차지하면 운봉고원과 장계분지의 거대한 제철산지를 확보할 수 있었기에 7세기 초 백제와 신라 간 치열한 각축전의 중심지가 됐다. 당시 백제는 관산성 전투의 패전으로 충청북도 일대의 성들이 매우 견고함을 뼈저리게 느꼈고, 무왕대에 이르자 노선을 대폭 바꾸어 대가야로의 진출을 위해 아막성 일대를 도모한다.

아막성은 남원의 월산리·두락리 고분군과 함께 원래 가야땅이었는데, 대가야가 신라에 점령당함으로써 신라의 영역이 돼버렸다. 백제는 이곳을 차지해 자연스럽게 대가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로를 확보하려 한 것이다.

당시의 아막성 전투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상세히 기록돼 있어 전투 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백제 무왕 3년(602) 가을 8월에 왕은 군사를 출동해 신라의 아막성을 포위했다. 신라 왕 진평이 기병 수천 명을 보내 막아 싸우니 우리 군사가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신라가 소타(小陁), 외석(畏石), 천산(泉山), 옹잠(甕岑)의 4성을 쌓고 우리 강토 가까이 쳐들어 왔다. 왕이 노해 좌평 해수에게 명령,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4성을 공격하게 했다.”

“가을 8월, 백제가 아막성(阿莫城)에 쳐들어왔다. 임금이 장수와 졸병들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해 크게 쳐부수었으나,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그곳에서 전사했다. 모든 군사들이 이를 보고 떨쳐나가 공격하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말 한 필, 수레 한 대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

백제가 먼저 아막성으로 진격, 선공을 취했으나 신라가 오히려 백제군을 격파하고 백제의 영토로 침입해와 오늘날의 남원 일대에 4성을 쌓았고, 이에 분노한 무왕은 4만이나 되는 대군을 보내 수복하게 한다.

하지만 신라의 장수 무은과 귀산의 활약으로 백제군은 대부분이 궤멸당했으며 총지휘관인 해수는 단신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막성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는 이를 통해 백제가 소백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하고 옛 가야지역의 지배를 공고히 했다.

한편 백제 무왕은 해수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해씨 일족을 대거 정리하는 등 아막성 전투를 통해 왕권을 강화했고, 재위 17년에 결국 아막성을 점령한 뒤 신라 영토 깊숙이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아막성 전투를 시작으로 고대 삼국의 국운을 건 쟁탈전이 시작된 것이다.

아막성 집수시설 내부에서 출토된 토기들. (자료=남원시)
아막성 집수시설 내부에서 출토된 토기들. (자료=남원시)

 고대 왕국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아막성

아막성은 백제와 신라 두 나라가 국운을 걸고 쟁패를 벌였던 곳으로 그 당시로는 매우 큰 성이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요인이 오늘날 백제와 신라, 가야계 유물이 다수 공존하는 보물창고를 탄생하게 했다.

5세기 이후 가야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한 대가야는 왜와 중국 다른 나라와 연결할 바닷길이 필요했고, 아막성은 섬진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섬진강에서 아막성에 이르는 봉우리에 남아 있는 봉화대 터는 물길을 지키려는 가야가 세운 것이며 가야 고분군락이 곳곳에 산재한다. 가야가 처음 터를 닦고 현재의 성벽은 신라 때 다시 넓게 고쳐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아막성에서 발견된 신라 대형 집수시설. (자료=송미경 기자)
아막성에서 발견된 신라 대형 집수시설. (자료=송미경 기자)

또 아막성 북쪽 기슭 하단부에서 동서로 긴 장방형의 집수시설이 발굴되면서 아막성의 학술적 가치도 주목받고 있다. 조사 결과 집수지 1기와 도수로 목주열의 잔존 현황이 확인됐으며 집수지는 길이 9.5m, 너비 7.1m, 최대깊이 2.5m로 전북지역 최대급에 해당한다. 집수시설 내부에서는 삼국시대 신라 말 고려 초기에 제작된 신라 토기 외에도 가야와 백제 토기가 일부 출토됐다.

출토 유물 중 칠 원료가 담겨 있는 토기류가 특히 눈에 띄는데, 국내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남원 칠기문화의 전통과 역사를 복원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밖에 경주 월성 유적에서 나온 곰을 중심으로 소, 개, 고라니, 두루미 등 다양한 동물 유체 등이 출토됐고 옻나무 수액이 바닥에 붙은 상태로 신라토기가 나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가야문화연구소장)는 "아막산성은 백제와 신라가 국운을 걸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며 삼국사기에 두 번이나 등장하는 성"이라며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적 중요성이 상당하기 때문에 반드시 잘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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