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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조명] 중고제 ‘서산승무’... 무대화되지 않은 1930년대 형태의 승무

[집중 조명] 중고제 ‘서산승무’... 무대화되지 않은 1930년대 형태의 승무

  • 기자명 박두웅 기자
  • 입력 2022.11.2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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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영 “맹글어 추지 말어, 호흡보다 몸이 놀아야 혀”

심화영류 승무 전수 조교인 심화영 외손녀 이애리 (박두웅 기자)
심화영류 승무 전수 조교인 심화영 외손녀 이애리 (사진=박두웅 기자)

[뉴스더원 충남=박두웅 기자] 일제강점기 최고의 판소리 명창이었던 심정순(1873~1937)은 충남 서산 학돌재에서 태어났다.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되는 20세기 초반 피리와 퉁소의 명인 심팔록으로부터 기예를 물려받은 심정순은 당시 서울 무대를 쥐락펴락한 최고의 예인으로 인정받았다. 

1910년대 초반 서구식 극장인 장안사 소속으로 이른바 ‘심정순 일행’을 꾸려 지방순회 공연을 다닐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또 1911년 음반 취입을 하고, 신문연재, 방송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면서 선구자적 면모를 과시했다.

그런 심정순은 서구문물의 유입과 일제강점이라는 격동의 시기에 우리의 가무악을 보전 전승하기 위해 치열한 활동을 전개했다. 내포제 거장 홍성 출생의 한성준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 조선음률협회, 조선음악무용연구회 등 각종 단체를 결성하여 사라져 가는 전통예술의 맥을 잇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승무는 우주가 열리면서 생명이 태어나 자라고 성숙하고 열매 맺은 다음 다시 제자리로 회귀하는 생명 본성의 근본을 형상화한 춤이다. (박두웅 기자)
승무는 우주가 열리면서 생명이 태어나 자라고 성숙하고 열매 맺은 다음 다시 제자리로 회귀하는 생명 본성의 근본을 형상화한 춤이다. (사진=박두웅 기자)

특히 ‘쇠퇴해가는 조선 가무악의 침체’는 그들로 하여금 민족예술을 보존 계승해야 한다는 책무를 일깨웠다. 이들의 노력은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 조선’이라는 상호 이항대립적 노정에서 ‘우리 것’을 지켜내려 한 일종의 몸부림으로 간주된다.

일제 총독부의 문화정책으로 민족 전통예술의 쇠락의 길을 걷는다. 전통예인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일부는 거리를 방황하다 거리의 객이 되기도 했다. 

「심화영류 승무」는 충청 지역 고유의 승무를 펼쳐 온 독창성과 예술성을 높이 평가받아 2000년 1월 11일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박두웅 기자)
「심화영류 승무」는 충청 지역 고유의 승무를 펼쳐 온 독창성과 예술성을 높이 평가받아 2000년 1월 11일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사진=박두웅 기자)

고향으로 돌아 온 심정순은 당시 서산군 읍내동에 아들 심재덕과 함께 낙원식당을 열어 전통예인들의 사랑방이자 아지트를 만들었다. 당시 낙원식당에 드나들던 예인으로는 명창 이동백을 비롯 김창룡, 한성준, 이화중선 등 당대 내노라하는 명인·명창들이 총망라되었다. ‘낙원식당’은 우리의 가무악을 지켜내는 아지트요, 전통예인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낙원식당에서는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그나마 설움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판소리 가무악이 공연되었고, 엔가를 비롯한 일본의 서구 문물은 상서로울 瑞, 서산(瑞山)의 숨통을 더욱 쥐었다. 이동백과 한성준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이면, 폭설을 핑계로 몇 날 며칠을 묵었고, 소리와 춤으로 세상을 한탄했다. 

그러나 율방 ‘낙원식당’은 1930년대 들어 전통예술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감시, 핍박이 거듭되면서 심화영이 오빠 심재덕과 함께 청진으로 이사 가면서 막을 내렸다. 당시 청진권번은 조선의 전통예인들이 핍박을 피해 집결해던 곳으로 한성준은 춤사범으로, 심재덕은 악기사범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청진권번 또한 1940대 초반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됐다. 

서산에 머물고 있던 심정순은 1937년 향년 64세에 타계하였고 인근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택지개발로 공동묘지를 이장하던 때에 고인의 유해를 다시 화장했다. 서산시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기려 1993년에 서산문화회관 한켠에 기념비를 세웠다. 

심화영 “중고제는 떨칠 수 없는 운명”

「심화영류 승무」는 시작과 끝을 목탁 소리에 맞춰 합장하며 인사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어 서서 시작하는 점이 특징이다. (박두웅 기자)
「심화영류 승무」는 시작과 끝을 목탁 소리에 맞춰 합장하며 인사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어 서서 시작하는 점이 특징이다. (사진=박두웅 기자)

“맹글어 추지 말어, 호흡보다 몸이 놀아야 혀” “옛날에는 소리 잘하면 감추고 살았지. 요샌 노래방도 있고 다들 자랑이고 벼슬이여”

일제강점기. 요즘 탤런트 빰치는 세련된 미모, 한복 위에 여우목도리를 한 모던걸. 서산승무를 창안해 낸 故 심화영 선생의 생전의 말씀이다. 

심화영은 충남 서산 출신의 예인 심정순의 둘째 딸로 태어나 부친의 음악 자산을 물려받았다. 심정순이 장안사에서 인기가 한창이던 시절, 파고다 공원 근처에서 태어난 심화영은 광대의 딸이라는 이유로 주변의 천대를 감내해야 했다. 

어린 시절 남복을 하고 서당에 다녔고, 훈장 집 아이를 봐주는 것으로 월사금을 대신했다. 열두 살 무렵에는 두 살 아래 심상건의 장녀인 심태산과 함께 신창 소학교에 다녔다. 오빠가 영어에 능통한 선교사들과 친한 덕분에 이화학당에 입학한 김활란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 유년시절 대부분을 서산에서 보냈다. 

일제강점기 심화영 생전 사진. (사진=심화영 외손녀 이애리 제공)
일제강점기 심화영 생전 사진. (사진=심화영 외손녀 이애리 제공)

하지만 예인의 피가 흐르던 그녀에게 중고제는 떨칠 수 없는 운명과 같았다. 그녀는 스스로 예인의 삶을 살았다. 심화영. 그녀는 18세에 오빠에게 판소리 춘향가와 심청가 한바탕, 양금, 승무를 배웠고, 20세에 기녀 이옥화의 소개로 함경도 청진권번에서 10년간 활동했다. 1945년 4월경 서산으로 낙향한 심화영 선생은 33세에 송 씨와 결혼한다. 이후 활동을 중단했다가 50대 중반 이후 활동을 재개하였고, 2000년에 충남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무대화되지 않은 1930년대 형태의 승무... 서산승무

심화영류 승무의 전체적인 춤 구성은 염불-자진염불-타령-자진타령-굿거리-법고-굿거리의 순서로 되어 있다. (사진=박두웅 기자)
심화영류 승무의 전체적인 춤 구성은 염불-자진염불-타령-자진타령-굿거리-법고-굿거리의 순서로 되어 있다. (사진=박두웅 기자)

승무는 지역마다 조금씩 특징을 달리하며 전승되어 왔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900년 이후 한성준(韓成俊)의 노력으로 예술무용화한 경기·충청 지방의 승무와 이대조(李大祚)에 의하여 발전된 호남 지방의 승무이다. 

한성준의 승무는 한영숙에게, 이대조의 승무는 이매방에게 전승되어 한영숙류와 이매방류로 나뉜다. 한영숙류는 이애주와 정재만이 계승하여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또 이매방의 문하에서 배운 채상묵이 2019년 11월 25일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이와 달리 충남 서산의 「심화영류 승무」는 전통 예능인 집안 출신의 심화영(1913~2009)이 전승한 춤으로, 춤의 형식과 복식 등에서 타 지역의 승무와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심화영의 승무는 충청도 지역에서 춤 잘 추기로 유명했던 방 모(某)에게 전수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적인 춤 구성은 염불-자진염불-타령-자진타령-굿거리-법고-굿거리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연희 시간은 20여 분이다. 

염불은 스님이 되기 전에 참선을 하며 마음을 비우고 수행하는 내용이며, 자진염불은 스님이 되어서 기뻐하는 내용, 타령은 스님이 도를 닦으며 기도하는 내용, 자진타령은 스님이 바깥세상에 유혹을 받는 내용, 굿거리는 스님이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속세로 들어간다는 내용이다. 염불, 도드리, 타령, 굿거리, 자진모리 등 장단의 변화에 따라 춤을 추며, 반주로는 피리, 대금, 해금, 장구, 북이 사용된다. 

승무에는 춘하추동, 희로애락, 생로병사, 인의예지 등의 자연적이며 우주적인 생명철학을 내포하고 있다. (박두웅 기자)
승무에는 춘하추동, 희로애락, 생로병사, 인의예지 등의 자연적이며 우주적인 생명철학을 내포하고 있다. (사진=박두웅 기자)

일반 승무는 엎드려서 시작하는 반면에 「심화영류 승무」는 시작과 끝을 목탁 소리에 맞춰 합장하며 인사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어 서서 시작하는 점이 특징이다. 심화영류 승무는 일반적인 기존 승무와는 달리 무대화되지 않은 1930년대 형태의 승무로 염불 장단이 다른 승무와는 달리 여섯 장단으로 구성된다.

「심화영류 승무」는 충청 지역 고유의 승무를 펼쳐 온 독창성과 예술성을 높이 평가받아 2000년 1월 11일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심화영류 승무」가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심화영 승무보존회가 결성되었으며, 전수 조교인 심화영 외손녀 이애리와 이수자인 서은희 등 10여 명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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