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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여행] KTX 이음 타고 떠나는 영주 ‘관사골’ 여행

[스토리텔링 여행] KTX 이음 타고 떠나는 영주 ‘관사골’ 여행

  • 기자명 임요희 여행작가
  • 입력 2022.08.06 00:00
  • 수정 2023.03.08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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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영주동 관사골
홍수를 예측한 놀라운 설계
안동을 제치고 경북 최대의 철도중심지가 된 영주

도시재생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관사골.
도시재생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관사골.

[뉴스더원=임요희 여행작가] 청량리역 오전 9시, KTX-이음 707 열차가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 왔다. 중앙선을 타고 영주를 방문하기는 처음이었다. 열차는 양평, 원주, 제천, 단양을 거쳐 영주에 나를 내려놓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영주는 여자 이름을 연상시키는 도시지만 부석사, 소수서원, 무섬마을과 같은 묵직한 여행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 KTX를 이용하면 경상북도라는 지리적인 거리감이 무색하게 서울에서 1시간 40분 만에 도달할 수 있고 볼거리도 많아서 영주는 정말 많은 사람이 찾고 그만큼 속속들이 알려져 있다. 

더 캐낼 스토리가 남아 있을까 싶은 영주에, 선비, 한옥, 사찰을 빼고 논하기 어려울 것 같은 영주에 그런데 보석같은 장소가 숨어 있었다. 영주의 숨은 여행지 ‘관사골’ 이야기다.

80년 전에 건설된 영주동 관사골

영주를 대표하는 마을은 영주동이고, 그중에서도 영주1동이 영주의 으뜸이라는 데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관사골의 정체성을 살린 벽화 작품.
관사골의 정체성을 살린 벽화 작품.

영주1동 ‘관사골’은 1940년대 여러 채의 철도관사가 들어서면서 얻게 된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철도관사는 민간인 주거보다 한발 먼저 근대화를 도입, 도심 주택의 선진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고급주택가의 상징이었던 관사골은 영주역이 1973년 휴천동으로 이전하면서 도시 공동화를 거쳐 달동네로 전락했다. 2021년 시정부가 4억여 원을 투입해 벽화마을로 재탄생시키지 않았다면 관사골은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지 모른다.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관사골 프로젝트.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관사골 프로젝트.

전성기 적 모습을 완전히 되찾은 것은 아니지만 2022년의 관사골은 쇠락의 기운 만큼은 말끔하게 벗어버렸다. 거리는 깔끔해졌고 담벼락에는 그 시절 영주역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 가득하다. 

관사골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여러 면에서 의미 있는 사업이었다. 지역 예술인에게는 일거리가 제공되었고, 주민에게는 문화 향유의 기회가 주어졌으며, 영주1동은 관사골의 한 많은 역사와 스토리를 보존하게 되었다. 

철탄산 양지바른 언덕에 터를 잡다

관사골의 출발은 일제강점기이던 1941년 7월 1일 영주역이 영업을 개시하는 것과 때를 같이 한다. 

철탄산 양지바른 언덕에 터를 잡다.
철탄산 양지바른 언덕에 터를 잡다.

당시만 해도 이웃인 안동이 철도거점 도시로 성장하고 있어서 영주역은 중간역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관사 역시 소규모 단지를 이루었다.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관사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는 나름 소신을 가지고 관사 터를 골랐다. 침수의 우려가 없고 조용하면서 남향인 땅이 필요했는데 영주역에서 10분 거리 철탄산 언덕에 건축가의 구미에 딱 맞는 장소가 있었다.

건축가는 철탄산 경사면을 따라 관사를 두 줄로 나란히 배치한 후 가운데에 골목길을 냈다. 전쟁 직후 찍은 항공사진을 보면 마치 대지에 가나초콜릿을 올려놓은 듯 정렬된 모습의 관사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관사들은 잦은 증개축을 겪었지만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직사각형의 틀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중이다.

한 지붕 두 가족 형태의 관사

관사골에는 현재 총 7가구의 관사가 자리 잡고 있다. 

환기구 아래에 7호라고 적힌 표식이 있다.
환기구 아래에 7호라고 적힌 표식이 있다.
민간인 주택의 근대화를 선도한 관사주택.
민간인 주택의 근대화를 선도한 관사주택.

‘해방 이전 건립된 철도관사의 공급방식과 평면유형의 특성에 관한 연구’ 자료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철도관사는 3~6등급이라는 건축 등급을 따른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영주관사는 ‘7등갑’ ‘7등을’ ‘8등급’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관사는 한 동에 두 가구가 거주하도록 연립의 형태로 지어졌는데 마당 한가운데 놓인 담장으로 인해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독립가옥이라고 해도 좋은 수준이었다.

관사마다 상부 환기구 밑에 1호, 2호 하는 식으로 호수 표식을 해두었다. 명패를 나무로 제작하다 보니 다행히 존재하는 것도 있지만 사라진 게 대부분이다. 이 표시는 단지 집의 위치를 표시하는 것으로 거주인의 지위를 나타낸 것은 아니라고 한다.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5호, 7호

1973년 당시 영주역이 휴천동으로 완전히 이전하면서 역무원들도 일반인에게 집을 팔고 떠났다.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7호 관사.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7호 관사.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5호 관사. 현재 내부 수리 중이다.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5호 관사. 현재 내부 수리 중이다.

가옥을 수리하고 증축하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었기에 지금 남아 있는 관사들을 보면 겹박공의 지붕을 갖고 있는 집이 많다. 그만큼 증축이 잦았다는 이야기다.  

1호와 2호 관사는 상당 부분 현대식으로 개조되어 문화재의 가치를 잃었고 다행히 형태가 온전히 보존된 5호, 7호 관사가 국가등록문화재에 지정되었다. 5호의 경우 부속건물이 많이 추가되었지만 7호는 부속건물이나 증축 없이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7호는 ‘7등갑’으로 분류되는 건축물로 건물의 규모로 볼 때 지위가 있는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내부를 공개하지 않아 안까지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어디에도 손을 댄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내부 공사 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문에 의하면 당시 철도관사는 집 내부에 화장실과 목욕시설이 존재했다고 한다. 수세식이었던 것은 아니고 재래식 화장실 형태로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했다. 

경북 최대의 철도 도시로 성장한 영주

관사촌의 전성기는 영주역이 잘나가던 시기와 겹친다. 중앙선은 1936년 말 북부의 청량리역과 남부의 영천에서 나란히 공사가 시작되었다. 

관사골 떡방마을센터 옆에 과거 영주역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관사골 떡방마을센터 옆에 과거 영주역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영주는 중앙선 중간 구간에 해당했는데 아래에서 올라오는 속도가 빨라 1941년 안동과 영주 구간이 먼저 개통됐다. 영주에 철도관사가 들어선 게 이 시기다.

그리고 1942년 2월 북부에서 내려오는 제천 구간과 영주가 연결되면서 중앙선은 완전한 개통을 맞이했다. 앞에서 밝혔지만 영주역이 보통역에 지나지 않은 것에 비해 안동역은 지방철도 사무를 관장할 만큼 큰 역이었다.

영주가 안동을 밀어내고 그 지위를 꿰찬 것은 석탄을 운반하는 영암선(영주-철암) 철도가 개설된 데 이어 일제 말엽 문을 닫았던 경북선이 복원되면서 점촌-영주 노선을 확정했기 때문이었다. 

영주동 근대역사문화거리 ‘풍국정미소’.
영주동 근대역사문화거리 ‘풍국정미소’.

철도청 입장에서 많은 노선의 철도가 지나는 영주로 철도국을 이전하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이었다. 이에 안동철도국과 삼척의 지방운수국을 통합하여 1961년 영주에 지방철도국이 신설되었다. 

현재 영주역은 중앙선, 영동선, 경북선의 철도역이자 한국철도공사 경북본부의 관리역으로 이 역을 지나가는 모든 여객 열차가 정차한다. 그리고 객차 사무소, 화차 사무소, 보선사무소, 기관차사무소도 자리 잡고 있다. 명실상부 경북 최고의 철도교통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영주역은 떠나고 관사골만 남다

영주역이 탄탄대로를 걸으며 잘나가는 동안 영주동 관사골은 반대의 길을 걸었다. 

관사골 뒤편 부용대 정자에 오르면 영주 구시가지와 서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관사골 뒤편 부용대 정자에 오르면 영주 구시가지와 서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961년 여름 큰비가 내려 서천이 범람하는 일이 있었다. 영주 전체가 물에 잠기는 중에도 관사골은 미래를 내다본 건축가 덕에 수해를 비켜갈 수 있었다.

그러나 건축가가 내다보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박정희 정권의 저돌적인 국토개발 논리였다. 박정희 군부 정권은 서천을 직선화하는 것만이 영주를 수해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 믿고 산허리를 자르고 강을 메우는 대단위 토목공사에 들어갔다. 

도무지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일이 현실화되면서 영주는 수마의 위협을 물리치는 동시에 생각지도 못했던 탁 트인 시가지를 갖게 되었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영주역도 비좁은 구도심을 벗어나 휴천동으로 새 역사를 지어 이전할 명분이 생겼다. 그때가 1973년의 일이니 이후 50년간 관사골은 주욱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7호 관사 앞에 세워진 국가등록문화재 안내문.
7호 관사 앞에 세워진 국가등록문화재 안내문.
증축이 반복되면서 겹겹의 박공지붕을 갖게 된 관사.
증축이 반복되면서 겹겹의 박공지붕을 갖게 된 관사.

다행히 2021년 도시 재생사업을 통해 관사 일부가 문화재로 지정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다는 것이 관사골 스토리 대강의 줄거리다. 지금 관사골에는 멀쩡한 관사도 있지만 완전히 헐리거나 반만 헐리거나 개조된 관사가 대부분이다. 

문화재 지정을 조금만 서둘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한편 이나마라도 지킬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선비의사가 살던 영주동 근대한옥 

영주동에는 관사골 말고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근대한옥이 한 채 있어 같이 둘러보면 좋다. 

영주동의 근대한옥 ‘이석간 가옥’.
영주동의 근대한옥 ‘이석간 가옥’.
100년 세월을 간직한 기와.
100년 세월을 간직한 기와.

영주동 근대한옥은 조선 명종 때 선비의사(儒醫)로 꼽히는 이석간의 가옥이었다, 명나라 황제가 자기 어머니 병을 고쳐준 답례로 이석간에게 99칸짜리 집을 하사했다고 한다.

전란 등 세월의 풍파를 겪으면서 고래등 같은 가옥은 사라지고 1929년 고쳐 지은 별채만 한 채 덩그러니 내려오고 있다. 조선 시대 전통가옥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근대한옥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 가볍게 둘러볼 만하다. 

부석태로 만든 영주 로컬푸드 청국장.
부석태로 만든 영주 로컬푸드 청국장.

영주에는 사과, 한우만 유명한 게 아니다. 영주의 전통 콩 ‘부석태’를 모르고 영주 미식을 논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자. 부석태는 일반 콩보다 크고, 식감이 부드럽고, 단맛이 강해 마니아까지 있을 정도다.

영주 도심을 걷다 보면 부석태를 이용한 청국장 식당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풍기역 앞에 있는 ‘한결청국장’은 밑반찬으로 나오는 샐러드까지 부석태 청국장 드레싱으로 통일하는 정성을 보이고 있다. 40년 전통의 향토음식점으로 2021년 ‘백년가게’로 선정됐다. 청국장 정식이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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