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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여행] 고래의 도시 ‘울산’으로 ‘시간여행’ 어때? “고뤠?”

[스토리텔링 여행] 고래의 도시 ‘울산’으로 ‘시간여행’ 어때? “고뤠?”

  • 기자명 임요희 여행작가
  • 입력 2021.11.27 12:55
  • 수정 2022.10.2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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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 상류 암벽에 고래 그림이 새겨진 까닭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경 유적 ‘반구대 암각화’
국내 포경산업의 전진기지 ‘장생포’

공업도시에서 생태도시로 거듭나고 있는 울산.(임요희)
공업도시에서 생태도시로 거듭나고 있는 울산.(임요희)

[뉴스더원=임요희 여행작가] 정일근 시인은 시 '나의 고래를 위하여'에서 ‘고독한 사람은 육지에 살다 바다로 다시 퇴화해’ 간다고 했다. 고독한 사람은 잠을 자도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둔다. 향수의 다른 말은 외로움이다. 포유동물인 고래가 바다로 간 것도 외로워서일까? 

천명관 작가는 소설 <고래>에서 거대한 것의 비극성을 탐색했다. 대왕고래는 뭍과 물을 통틀어 가장 거대한 동물이다. 몸무게와 외로움의 크기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거대한 육체가 맥없이 그물에 걸리고, 죽고, 해체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 아닌 게 아니라 꽤 비극적으로 느껴진다.

이번 주에는 비극적인 듯 매력적인 고래의 흔적을 찾아 울산으로 떠나보자.

태화강 상류의 고래 그림 ‘반구대 암각화’

울산은 고래의 도시다. 포경산업과 고래 가공 산업이 발달했던 그곳에는 약 5천 년 전, 선사시대 고래사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선사시대 고래사냥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반구대 암각화. 빨간 동그라미 안에 290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임요희)
선사시대 고래사냥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반구대 암각화. 빨간 동그라미 안에 290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임요희)

울산광역시 울주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의 흔적이다. 35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가 반구대안길로 진입, 대곡천 ‘반구교’를 건너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반구대암각화가 나타난다. 

반구대란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의 바위’란 뜻으로 태화강 상류 대곡천 절벽을 이르는 이름이다. 암각화가 그려진 곳은 마을 사람들이 ‘건너 각단’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암각화와 전망대 사이에는 대곡천이 흐르고 있어 근접하여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전망용 망원경이 준비되어 있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볕이 좋은 날에는 음영 효과가 두드러져서 그림이 더 잘 보인다.

전체 그림 수는 290여 점으로 10m x 3m 안에 집중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 고래 그림만 58점이다. 그러니까 암각화의 주인공은 고래다. 

울산 앞바다를 찾아온 고래들

반구대암각화는 지금 봐도 ‘아, 이건 상괭이, 이건 혹등고래!’ 하고 이름을 알아맞힐 정도로 고래의 특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음영을 강조하여 재가공한 암각화를 보면 구분이 더 쉽다.

음영을 강조해 재가공한 암각화. 붉은 원이 새끼 업은 귀신고래, 노란 원이 작살 맞은 고래. Ⓒ울산시
음영을 강조해 재가공한 암각화. 붉은 원이 새끼 업은 귀신고래, 노란 원이 작살 맞은 고래. Ⓒ울산시

그림을 살펴보면 작살을 등에 꽂은 고래(노란 원)가 눈에 들어온다. 고대 울산인들은 물길을 따라 육지의 안쪽으로 헤엄쳐 들어오는 고래를 노려 작살을 꽂았다. 

새끼 고래를 등에 업은 어미 고래(붉은 원)도 보인다. 이 고래는 귀신고래다. 귀신고래는 여름에는 알래스카에서 먹이활동을 하고, 겨울이 되면 새끼를 낳기 위해 따뜻한 바다를 찾아 남하한다.

이때 연안에 바짝 붙은 상태로 떼를 지어 이동하는데 이는 천적인 범고래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귀신고래는 피부로 수온을 느끼고, 소리의 반사에 귀 기울이며 자신이 태어난 곳을 찾아간다. 

귀신고래의 모습. 1977년 이후 한반도에서는 귀신고래가 자취를 감추었다. ⒸGettyImages
귀신고래의 모습. 1977년 이후 한반도에서는 귀신고래가 자취를 감추었다. ⒸGettyImages

그렇게 두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브리칭과 잠수를 반복하며 귀향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귀신고래의 평균 이동 거리는 왕복 14.000km에 달한다. 고래 가운데서도 가장 긴 거리를 이동하는 셈이다. 

혹등고래의 경우 왕복 8,000km 정도를 이동한다. 연안을 따라 헤엄치는 귀신고래와 달리 알래스카에서 출발해 태평양을 직선으로 가로질러 하와이까지 이동한다. 이동 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울산, 포항 등지에도 오호츠크해에서 먹이활동을 하던 귀신고래가 새끼를 낳기 위해 해마다 방문했었다. 그러나 1977년 울산에서 발견된 두 마리를 끝으로 더 이상 한반도에서는 귀신고래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조사 결과 사할린에 한국계 귀신고래 150여 마리가 서식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언젠가 동해를 기억하고 다시 내려오지 않을까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경 유적

반구대암각화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1년의 일이다. 앞서 동국대 박물관 조사단은 1970년 12월 24일 울주 지역의 불교유적을 조사하기 위해 반구대를 방문했다. 그들은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반고사(盤皐寺) 터를 찾고 있었는데 마을의 최경환 어르신이 혹시나 하고 ‘천전리 각석’의 존재를 제보했다.

천전리 각석은 사람, 사슴, 짐승, 뱀, 새, 물고기가 새겨진 고대 유적이다. 신라유적은 아니었지만 대단한 발견을 한 것이다.

그리고 꼭 1년 후인 1971년 12월 25일 동국대 문명대 교수를 비롯한 고려대 김정배 교수, 충북대 이융조 교수가 천전리 각석을 재조사하기 위해 울주를 방문했다. 

1702년 언양의 유생들이 포은을 기리기 위해 반구대에 세운 ‘반구서원’.(임요희)
1702년 언양의 유생들이 포은을 기리기 위해 반구대에 세운 ‘반구서원’.(임요희)

천전리 각석을 통해 암각화의 가치를 깨닫게 된 최경환 어르신은 “저 위 절벽에 또 다른 암각화가 있다”며 조사단에 제보했다. 최경환 어르신은 손수 배를 준비해 일행을 암각화 앞까지 안내했는데 이때 발견된 게 바로 반구대암각화다. 

고 최경환(1909∼1978) 어르신은 ‘집청정’을 건립한 운암(雲巖) 최신기(1673∼1737)의 9대손이다. 원래 반구대는 포은 정몽주가 언양에 유배를 왔다가 이곳 경치에 반해 돗자리를 깔고 앉아 시를 지었던 곳이다. 사람들이 반구대를 포은대(圃隱臺)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1702년(숙종 28) 언양의 유생들이 반구대에 서원 건립을 추진해 성사되었고 이후 운암 최신기 선생이 ‘반구서원’ 건너편에 ‘집청정’을 지었다. 집청정은 반구정(盤龜亭)으로도 불린다. 운암의 후손들은 대대로 집청정을 지켜왔는데 그 명맥이 고 최경환 어르신을 거쳐 현 자손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래 그림을 그린 사람은 주술사

동국대 학술팀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미 암각화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암각화를 ‘귀신 그림’이라고 불렀다. 고래, 호랑이, 거북이 같은 그림이 바위에 새겨진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새긴 사람을 알 수 없었으니 귀신의 장난으로 생각한 것이다. 

반구대암각화와 관련해 다양한 자료를 전시 중인 ‘울산암각화박물관’. 건물이 고래 형상을 하고 있다. Ⓒ울산시
반구대암각화와 관련해 다양한 자료를 전시 중인 ‘울산암각화박물관’. 건물이 고래 형상을 하고 있다. Ⓒ울산시

그렇다면 왜 고대인들은 이 깊은 산중에 암각화를 새긴 걸까. 연구자들은 암각화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주술적 성격이 짙다고 말한다.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의미에서 영험한 동물들을 새겼다는 것이다.

암각화에서 알 수 없는 영기가 느껴지는 것은 선사시대에 조성된 에너지의 힘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이어져 오는 탓일 게다. 마을 사람들도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반구대암각화는 1995년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후보 목록인 ‘우선등재목록’에 올라있다. 귀신고래가 새끼를 낳기 위해 찾아오던 울산 남구 장생포 앞바다는 이보다 앞선 1962년, 귀신고래 회유해면(천연기념물 126호)으로 지정되었다.

울산은 이제 공업도시의 이미지에서 한 발 나아가 세계인이 주목하는 포경 유적지로서의 위상을 정립해나가는 중이다.

국내 포경산업의 전진기지 ‘장생포’

장생포에서 포경산업이 시작된 것은 19세기 말인 1899년의 일이다.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포경 허가권을 따낸 러시아의 ㈜태평양어업이 그 주체였다. 

장생포 앞바다는 국가 지정 ‘귀신고래 회유해면’이다. 울산대교가 장생포항을 가로지르고 있다.(임요희)
장생포 앞바다는 국가 지정 ‘귀신고래 회유해면’이다. 울산대교가 장생포항을 가로지르고 있다.(임요희)

귀신고래는 여름이면 알래스카에서 먹이활동을 하고 겨울이면 새끼를 낳기 위해 이곳 장생포 앞바다를 찾았다. 그 밖에 밍크고래, 참고래 등이 장생포를 근거지로 살아가고 있었다.

장생포를 무대로 포경산업이 활발히 이루어지자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기다렸다는 듯 포경 허가권을 가져갔다. 일본인은 장생포에서 잡아들인 고래고기 대부분을 일본 본토에 수출했다. 

광복 후 일본인이 물러간 자리를 한국인이 대신했다. 일제 포경선 선원 출신 200여 명이 공동 출자하여 ㈜조선포경을 설립한 것이다. 1970년대 장생포는 20여 척의 포경선이 드나드는 전국 최고의 포경산업기지로 성장했다. 장비도 업그레이드되어 100톤급 철선을 이용하는 등 규모가 커졌다. 

장생포는 1만여 명이 거주하는 대형 어촌으로 성장했다.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가 넘쳐났다. 

국내 포경산업의 전진기지였던 장생포항.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었다.(임요희)
국내 포경산업의 전진기지였던 장생포항.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었다.(임요희)

장생포의 영화는 영원하지 않았다. 1980년을 기점으로 마을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지나친 포획으로 고래의 씨가 마른 것이다. 1986년에는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상업포경금지를 결정했다. 장생포 사람들은 미국의 월권이라고 크게 반발했지만 소용없었다. 장생포의 고래잡이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대신 장생포는 조수간만의 차가 적어 대형 선박에 뭍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입지적으로 수출에 유리했던 장생포항은 현재 미포항과 함께 울산 최대 공업단지로 성장했다.

18m 고래가 마을에 들어온 날 

고래잡이 시절의 흔적은 ‘장생포 고래문화특구’에 보존되어 있다. 특히 울산대교가 바로 건너다보이는 지점에 고래문화마을(입장료 2000원)이 조성되어 장생포의 호시절을 재현해놓았다. 

고래 해체 광경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놓은 장생포 옛마을.(임요희)
고래 해체 광경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놓은 장생포 옛마을.(임요희)
1970년대 장생포는 20여 척의 포경선이 드나드는 전국 최고의 포경산업기지였다.(임요희)
1970년대 장생포는 20여 척의 포경선이 드나드는 전국 최고의 포경산업기지였다.(임요희)

동편진입로를 통과하면 바로 장생포 옛마을이다. 범고래 조형물이 방문객을 반가이 맞는 곳은 ‘고래막집’이다. 과거에는 고래고기를 삶아 술안주로 제공하던 집이었지만 지금은 옛날도시락 등 추억의 음식을 팔고 있다.

고래 해체 광경을 실물 크기로 재현하고 있는 곳은 고래 해체장이다. 건축물 철거를 연상시킬 만큼 규모가 크다. 그 옆 고래처리장에는 고래기름을 착유하던 시설물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고래 부산물 중 가장 널리 이용되는 게 고래기름이었다. 정유된 고래기름은 내연기관의 연료로 팔려나갔다. 그 외에도 화장품, 윤활유, 왁스로 가공되었다. 

고래뼈는 우산, 코르셋, 가구나 연장의 부품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고래수염은 구두솔, 칫솔의 재료였다. 고래가죽으로는 다양한 가죽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고래힘줄은 함성섬유가 개발되기 전까지 테니스 라켓줄에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향유고래 뱃속에 생기는 결석을 용연향(ambergris)이라고 하는데 값비싼 향료의 원료였다. 고래간유에는 지용성 비타민이 풍부해 건강식품으로 각광 받았다. 이처럼 고래는 버릴 게 없어 한 마리만 잡아도 꽤 큰돈을 만질 수 있었다.

장생포 옛마을에서 추억의 게임 ‘고래 뽑기’에 도전해보자.(임요희)
장생포 옛마을에서 추억의 게임 ‘고래 뽑기’에 도전해보자.(임요희)

장생포 옛마을에서 가장 핫한 곳은 추억의 게임 ‘뽑기’ 체험장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덩달아 이곳의 주가도 올라가고 있다.

세모, 동그라미가 너무 쉽다면 고래 뽑기에 도전해보자. 중상 이상의 난이도지만 오징어게임의 이정재 배우처럼 뒷면에 침을 열심히 바르면 성공할 수 있다.

그밖에 우체국, 국민학교, 사진관, 서점, 구멍가게, 방앗간 등 1970년대 장생포의 옛 모습과 만날 수 있다. ‘돈을 물고 다니는 강아지’는 판타지적 상상력이지만 이상하게 실감난다. 진짜 그랬을지도 모른다.

슬도에서 만난 ‘새끼 업은 귀신고래’

‘슬도’는 울산 동구 방어진항에 인접한 아주 작은 섬이다. 항구에서 뻗어 나온 북방파제로 연결된다. 슬도는 거문고 '슬(瑟)' 자를 쓴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힐 때 거문고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슬도명파(瑟島鳴波)는 방어진 12경 가운데 하나다.

현무암이 아니다. 돌맛조개가 뚫어놓은 구멍이다.(임요희)
현무암이 아니다. 돌맛조개가 뚫어놓은 구멍이다.(임요희)

슬도 바위가 이런 신비한 소리를 내는 것은 표면을 덮은 타포니(tafoni) 구멍 때문이다. 이 자잘한 구멍은 석공조개(돌맛조개)가 집을 짓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용암지대도 아니면서 구멍이 뽕뽕 뚫린 바위들이 해변을 덮고 있다.

암석 구멍의 수는 모두 120만여 개라고 한다. 이런 것을 헤아린 사람은 구멍을 뚫은 석공조개보다 더 대단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방파제 끝 슬도교 입구에 대형 조형물이 서 있다.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반구대암각화에 새겨진 ‘새끼 업은 귀신고래’다. 새끼 업은 고래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방어진항 어선이 더 많은 방어와 물고기를 실어나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래 조형물을 세운 것이리라. 

슬도교 입구에 세워진 대형 조형물. 반구대암각화 ‘새끼 업은 귀신고래’를 형상화한 것이다.(임요희)
슬도교 입구에 세워진 대형 조형물. 반구대암각화 ‘새끼 업은 귀신고래’를 형상화한 것이다.(임요희)

반구대암각화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대곡천 반구교 인근 ‘울산암각화박물관’을 방문해보자. 현재 ‘대곡천 사냥꾼 바다를 만나다’ ‘박물관에 남겨진 바위그림’이라는 제목의 특별기획전(~2022. 3. 27)을 진행 중이다. 

아울러 이번 울산 지역 취재는 관광전문기자협회와 함께했으며 울산시청의 취재 협조가 있었음을 알린다.  

전복과 삼겹살의 절묘한 궁합

고래의 도시로 간다고 하니 지인들이 꼭 고래고기를 맛보고 오라고 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당부인가. 진돗개 취재하러 가는 사람에게 개고기 먹고 오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이건 고래에게 예의가 아니다. 울산에는 고래고기 말고도 다양한 먹거리가 있다.

살아있는 생물 전복을 삼겹살과 함께 구워 먹는 맛이란!(임요희)
살아있는 생물 전복을 삼겹살과 함께 구워 먹는 맛이란!(임요희)
한국사람은 김치. 전복을 다 먹고 나면 김치를 구워보자.(임요희)
한국사람은 김치. 전복을 다 먹고 나면 김치를 구워보자.(임요희)

울산 남구 삼산동의 ‘전복369’는 고급 식재료인 전복을 가성비 높게 즐길 수 있는 맛집이다. 전복삼겹살 세트(전복 3마리 + 삼겹살 150g)가 20,000원. 살아 있는 생물 전복을 삼겹살과 함께 구워 먹게 되어 있다. 

원한다면 따로따로 주문할 수도 있다. 전복 1인분에 1만원. 삽겹살 1인분에 1만원이다. 세트 메뉴를 시키면 큼직한 새송이버섯이 서비스로 딸려 나온다. 전복, 삼겹살, 버섯 이 세 가지 맛의 궁합이 절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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