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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의 픽(pick) 무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자꾸만 보고 싶은 '니 얼굴'

[이은선의 픽(pick) 무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자꾸만 보고 싶은 '니 얼굴'

  • 기자명 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 입력 2022.07.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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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뉴스더원=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플리마켓의 캐리커쳐 부스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말한다. “그림 그려주시는 건가봐.” 부스를 지키던 작가가 고개를 들어 답한다. “응, 니 얼굴.”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초면에 왜 반말이냐며 불쾌해 하는 대신 웃음으로 화답한다.

매달 셋째 주 주말, 경기도 양평의 북한 강변을 따라 열리는 ‘문호리리버마켓’의 인기 셀러 정은혜 작가의 부스 앞에서 벌어지는 풍경이다.

지난 6월 말 개봉한 다큐멘터리 <니 얼굴>은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주는 은혜 씨의 일상을 담는다. 2016년부터 마켓에 나와 활동을 이어온 그는 지금까지 4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그리며 돈을 벌었다.

은혜 씨는 아무리 날씨가 얄궂어도 마켓 출근을 포기한 적이 없는 성실한 예술가이며, “예쁘게 그려주세요”라는 손님들의 부탁에 “원래 예쁜데요, 뭘”이라는 사랑스러운 답변을 남길 줄 아는 사람이다.

은혜 씨는 다운증후군 발달장애인이다. 작은 키와 앳된 외모 덕에 어린 아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미 서른 살이 넘은 성인이다.

그는 얼마 전 종영한 TV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tvN)에 출연해 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해녀 영옥(한지민)의 쌍둥이 언니 영희 역이었다. 은혜 씨의 실제 모습을 느슨하게 반영한 캐릭터다.  

극 중에서 언니가 그린 그림을 찬찬히 둘러보던 영옥은 눈물을 터뜨린다. 그의 독백에는 영희가 홀로 그림을 그렸던 외로운 시간들이 묻어나온다. “너는 어쩌다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게 됐는가 물었다. 영희가 말했다.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그리다 보니 이렇게 잘 그리게 됐다고.”

하지만 이는 은혜 씨의 실제 상황과는 조금 다르다. 그에게 그림은 외로움을 견디게 해준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고립으로부터 빠져나와 세상과 연결하도록 만들어준 고마운 재능이다.

은혜 씨는 사람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눈다. 그림을 의뢰한 이들을 찍은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꼼꼼하게 캐리커쳐를 완성한다. “그놈의 인기” 때문에 당일 완성은 불가, 택배 배송해야 할 의뢰는 늘 쌓여 있다. 그의 주변은 활기 찬 친구들로 넘쳐난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과거에는 은혜 씨에게도 세상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던 시간이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상처를 받고 조현병 증세를 앓기도 했고, 가족들은 혼자만의 세계로 자꾸만 빠져드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그림에 대한 재능은 우연한 기회에 발견됐다. 어머니이자 만화가인 장차현실 작가가 화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중, 따라 나온 은혜 씨가 그린 그림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딸이 세상과 연결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문호리리버마켓에 그를 셀러로 참여시킨 것도 어머니다.

다큐멘터리스트이자 아버지인 서동일 감독은 은혜 씨를 응원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한 명의 예술가로 거듭나는 은혜 씨의 변화를 보면서 두 사람은 “나조차 내 아이를 편견을 가지고 바라봤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 역시 은혜 씨와 함께 부모로서 성장한 시간을 겪은 것이다.

다큐 속 은혜 씨를 둘러싼 세계는 일종의 유토피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은혜 씨를 바라보는 편견 어린 시선도, 그가 겪는 수많은 차별의 상황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들은 은혜 씨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인 일자리와 자립을 요구하는 투쟁의 시간을 오래도록 겪었지만, 다큐에 그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어머니인 장차현실의 짧은 머리카락으로부터 아이의 권리를 위해 삭발까지 감행했던 투쟁의 과거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니 얼굴>이 선택한 방향성이다. 이 다큐의 카메라는 은혜 씨가 발달장애인으로서 겪는 부당함과 불편함을 애써 고발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일상에 밀착하며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한 명의 주체로서의 책임감과 아름다움을 보게 한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장애인의 자립과 사회적 연결, 이를 둘러싼 공적 시스템에 대해 생각할 거리들을 던진다.

인물 다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주인공의 매력이다. 재주와 흥이 많고 촌철살인의 말솜씨를 지닌 은혜 씨의 매력은 차고 넘친다. 이는 정은혜라는 개인이 지닌 특수성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는 한 인물을 꾸준히 지켜본 결과로서 발견된 것들이기도 하다. 관심과 애정은 많은 것들을 보게 만든다. 당연하게 배제되었던 무언가를, 편견 때문에 볼 수 없던 것들을 인식하게 한다. 세상은 그렇게 더 옳은 방향으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다.

복지관에서 청소 일을 병행하던 은혜 씨는 이제 전업 작가가 됐다.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일터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은혜 씨는 현재 11명의 발달장애인 동료들과 함께 전업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다. 이미 여러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고, 8월에는 새로운 전시인 ‘포옹전’이 열린다. 사람들이 따뜻하게 포옹하는 모습들을 그린 작품만 모아 전시할 계획이다.

장차현실 작가는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의 부모들에게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괜찮습니다. 우리 아이가 장애를 안고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운이 나쁜 것도 기막힌 악몽도 아닙니다. 척박한 사회가 만들어 놓은 불행. 나의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 세상의 변화를 위해 함께 애쓰십시다.”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 한, 세상의 변화를 위한 노력은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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