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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의 픽(pick) 무비] 욕망이 만든 지옥에 사는 여자 '안나'

[이은선의 픽(pick) 무비] 욕망이 만든 지옥에 사는 여자 '안나'

  • 기자명 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 입력 2022.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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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뉴스더원=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때로 어떤 거짓말은 침묵에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말을 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잘못 알고 있던 정보를 굳이 바로잡지 않는 경우 같은 것.

하숙집에서 만난 선배가 “너 우리 학교 후배지?”라고 당연한 듯 묻는 순간, 입시학원에 다니던 재수생인 유미(수지)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소했던  거짓말은 점차 몸집을 불려간다. 대학에서 배우길 희망했던 과목은 자신의 전공과목이 되고, 지방에서 살고 있는 부모는 외국에 있는 것으로 탈바꿈한다. 그렇게 얻은 가짜의 삶은 유미를 점점 다른 인생으로 데려다 놓기 시작한다. 

<싱글라이더>(2017)로 데뷔한 이주영 감독의 신작이자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드라마 <안나>는 거짓말로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 여자의 이야기다. 총 6화의 구성 안에서 유미의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이후까지 다룬다.

가짜 대학생 행세를 하던 유미가 남자친구와 미국 유학을 떠나기 직전 정체가 탄로 나는 건 비교적 초반의 사연이다. 이후 온갖 아르바이트로 힘겹게 생활을 유지하던 유미가 학력 무관을 조건으로 내건 ‘마레 갤러리’에 취업하고, 그곳에서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처지의 현주(정은채)를 만나는 것이 본격적인 사건의 시작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현주는 아버지 소유의 갤러리에서 이사직을 맡고 있다. 실제로는 허울뿐인 직함이다. 악의는 없지만 타인을 향한 배려 역시 전혀 없는 현주 곁에서 유미의 굴욕감은 조금씩 쌓여간다.

그리고 그것이 더는 견딜 수 없는 크기가 됐을 때, 유미는 현주의 인생을 훔쳐 살기로 작정하고 도망친다. 현주의 영어 이름인 안나는 그렇게 유미의 새로운 정체성이 된다. 

드라마는 2017년 발간된 정한아 작가의 <친밀한 이방인>을 각색했다. 원작은 과거 자신이 쓴 미발표 소설을 누군가 훔쳐 발간한 것을 알게 된 ‘나’를 극의 화자로 둔다. ‘나’는 여러 번의 거짓 인생을 살았던 이유미라는 사람을 추적해간다.

소설에서 유미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어떤 사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뿐, 그 자신이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가지는 인물은 아니다. 

<안나>는 이 구조를 과감하게 바꿔 유미를 중심 화자로 끌어온다. 원작에서 심지어 성별까지 여러 번 정체를 바꿨던 이유미의 삶은 보다 간결하게 가지치기됐다. 드라마 속 유미는 현주의 과거와 학위를 이용해 대학교수가 됐고, 정치계에 진출한 젊은 사업가 출신 남편 지훈(김준한)으로 인해 점점 더 유명 인사가 되어가는 중이다.

원작에서는 다른 이름이었던 현주의 비중은 크게 늘었다. 드라마에서 그는 갈등의 핵심 인물이다. 유미가 자신의 삶을 훔쳐 지금의 인생을 얻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된 현주는 정체를 폭로하겠다는 빌미로 유미의 목을 죄어온다. 

‘나는 거짓말을 하는 기분을 알고 있다. 스스로를 진실에서 배제시키고, 거짓말쟁이라고 낙인찍고, 어둡고 습한 자기혐오의 늪에 가둘 때 느껴지는 작은 쾌감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원작 소설은 거짓말의 핵심을 이렇게 설명한다.

애초에 얻고 싶었던 것이 순간적인 우월감이든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든, 거짓으로 쌓은 자신의 모래성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기혐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안나>는 ‘사람들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씁니다’라는 유미의 내레이션으로 인물의 마음을 대변한다. 

<안나>는 애초에 유미가 왜 이런 삶을 살게 됐는지 그 원인을 하나로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인생에서 일종의 분기점이 됐을 만한 순간들을 최대한 다양하게 펼쳐놓으며 여러 각도로 짐작하게 만든다.

어릴 때 마을에 잠시 살던 외국인 부인이 그에게 가르친 ‘포커페이스’의 중요성, 학교 선생님과의 연애가 들통난 뒤 자기 존재를 철저하게 부정당했던 고등학생 때의 일화, 입시 과정에서 경험한 인생의 첫 패배, 넉넉하지 않은 집안 환경과 자신의 야심이 부딪치던 순간들, 그 모두가 크고 작게 유미를 추동한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 이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방에서 목을 죄어오는 유미의 현재는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의 선택으로 처하게 된 고난이다. ‘지옥은 장소가 아닌 상태’라는 보르헤스의 말처럼, 안나는 스스로가 만든 지옥 안에 갇혀있다.

욕망하는 바가 명확하며, 그것을 부정한 방식으로 취득해가는 유미 같은 인물이 지금껏 쉽게 허락되지 않았던 영역의 여성 캐릭터인 덕분에 <안나>는 한결 흥미로운 결을 가진다. 타인에 의해 대상화되거나 불행에 빠지는 대신 제 손으로 만든 우아한 감옥에 갇혀버린 여자. 유미는 동정을 바라지 않는 꼿꼿한 욕망의 주체다. 

현주를 포함해 유미의 주변을 구성하는 다른 여성 캐릭터들의 활용도 좋은 편이다. 유미의 유일한 친구이면서 이후 그의 진짜 사연을 추적해가는 기자 지원(박예영), 남편의 비서였으나 이후 유미의 곁에서 일하는 동명이인인 유미(박수연) 등이 각자의 자리에서 입체감을 만든다.

이들은 각각 유미와 느슨한 연대를 갖지만, 서로를 섣부르게 구원하는 손쉬운 결말의 주인공들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안나>는 드라마 <드림하이>(2011, KBS2)와 <건축학개론>(2012)를 본격적 시작으로 꾸준한 연기 행보를 보여온 수지가 배우로서의 좋은 도약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드라마 안에서 10대부터 30대까지 폭넓은 나이대를 소화한 그는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의 미세한 동요로서 안나를 표현한다. 발산보다는 수렴의 연기가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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