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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성의 횡단여행] 전범자 없는 대규모 전쟁, 미국 남북전쟁터에서 얻은 교훈

[전운성의 횡단여행] 전범자 없는 대규모 전쟁, 미국 남북전쟁터에서 얻은 교훈

  • 기자명 전운성 횡단여행가
  • 입력 2022.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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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성 횡단여행가,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명예교수
전운성 횡단여행가,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명예교수

[뉴스더원=전운성 횡단여행가] 오래 전, 미국 예일대학 농민연구소에서 1년을 보내며, 북미대륙의 역사와 다양한 사회문제를 직접 접해 보기 위해 자동차로 약 8만2000km를 달렸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펜실베니아 주의 게티스버그에서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로 달리면서 느낀 소회를 담아 본다.

먼저 게티스버그는 약 160여년 전 미국의 최대 위기였던 남북전쟁 승패의 분수령이 된 대격전지였다. 이곳은 1776년 미국의 독립을 선언한 필라델피아 서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인구 약 7500명이 사는 전형적인 농촌 도시다.      

가는 도중 주변에 보이는 낮은 구릉이 이어지는 도로 양쪽으로 온통 옥수수와 밀밭이었다.  게티스버그 국립군사공원에서 받은 가이드 북에는 당시의 작전지도와 날짜별 전투상황과 그림 등이 상세히 적혀있어 마치 당시의 전장 지휘관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당시 노예제도를 반대하던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이에 반대하는 남부 11개주가 미연방을 탈퇴한다. 이어 1861년 4월, 남군의 선공으로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1865년까지 4년 동안 각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게티스버그 마을의 기념품 가게. 북군 복장을 하고 있다. (사진=전운성)
게티스버그 마을의 기념품 가게. 북군 복장을 하고 있다. (사진=전운성)

이 전쟁의 분수령이 된 게티스버그 전투는 1863년 7월1일부터 3일간 북군 사령관 미드 장군과 남군 사령관 리 장군이 지휘하는 양군 사이에 벌어진 싸움이었다. 초기에 우세를 보이던 남군은 점차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리 장군은 일거에 전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1863년 봄, 7만5천여 명의 남군을 이끌고 북진하면서 북군 8만3천여 명과 게티스버그에서 조우하였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승리의 여신은 북군 편에 서면서 사실상 남북전쟁의 승패는 판가름 난다.  

이렇게 3일 간의 치열한 전투가 끝났을 때는 평온하던 게티스버그 평원은 약 5만1천 여명의 전사자와 실종자 및 부상자를 낸 참혹한 현장으로 바뀌었다. 거기에 5천 마리가 넘는 말시체가 뒹굴어, 여름 들판에 버려진 시체들의 썩는 냄새는 코를 찌르고 있었다.

게티즈버그 전투가 끝난 4개월 뒤에 유명한 링컨의 남북전쟁이 단순한 결합을 넘는 자유, 평등, 민주주의의 재탄생을 위한 투쟁임을 밝히는 연설이 행해졌다.

그러나 이 때부터 전쟁은 2년을 더 끌었다. 1865년 4월 남부 수도인 리치몬드가 북군에 함락되면서 전쟁은 북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어 데이비스 남부 대통령이 조지아 주 어윈빌에서 체포되었다. 이러한 생생한 모습은 마거릿 미첼이 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게티스버그 국립군사공원 내 북군 뉴욕 제1경포병여단 기념비 앞에서. (사진=전운성)
게티스버그 국립군사공원 내 북군 뉴욕 제1경포병여단 기념비 앞에서. (사진=전운성)

이렇게 4년 동안 이어진 처절한 내전은 2천여 차례의 전투를 통해 모두 61만 명의 전사자 및  실종자와 부상자를 냈던 미국 역사상 최대의 참혹한 전쟁으로 막을 내렸다. 이 후 1869년 미국 대법원은 연방탈퇴는 불법이었으며, 남부 맹방은 합법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판시함으로서 완전한 하나의 미국으로 재탄생했다.

이런 내용의 안내서를 보며, 게티스버그 전쟁터에 늘어선 각 주의 참전비와 양군의 장군동상 그리고 대대급 단위까지의 수많은 기념비들 사이를 지나는 느낌은 마치 양군의 모든 부대들로부터 사열을 받는 듯한 묘한 감정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군사공원 마을에 당시의 남군과 북군의 군복을 입은 기념품 판매원들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이곳을 뒤로 하였다.

사진이나 자석기념물 등으로 판매되는 데이비스 대통령, 리 장군, 잭슨 장군 부조상. (사진=인터넷 이미지)
사진이나 자석기념물 등으로 판매되는 데이비스 대통령, 리 장군, 잭슨 장군 부조상. (사진=인터넷 이미지)

그리고 이 싸움 이후 계속 이어지던 애틀랜타의 동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스톤 마운틴 파크의 거대한 화강암 돌산에 부조로 조각된 남북전쟁 당시의 데이비스 남부연방 대통령, 리 사령관, 스톤월 잭슨 장군 등 늠름한 남부 영웅들을 다시 만났다. 이 기마상을 보면서, 남부인의 자존심을 지켜준 이들에 대한 경의의 표시임을 느껴졌다.

이렇듯 북군이 승리한 요인으로 인구수와 경제력의 격차 그리고 무기 차이 등 외에도 노예제도 폐지라는 대의명분에서 북군은 남군을 누르고 있었다.

만일, 링컨이 무력으로 남부를 패배시키지 않았다면, 통일된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분단국가로서 남쪽은 농업중심, 북쪽은 공업중심의 모습으로 대립과 갈등을 겪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당시 링컨의 주된 관심사는 노예제도 폐지보다는 남부와 북부의 분리를 막는 것이 우선이었다 것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 남부 대통령이었던 데이비스와 리 장군 등은 석방되어 데이비스는 테네시 주의 보험회사 사장으로 리장군은 현 워싱턴 앤 리 대학교의 총장에 취임하여 남부발전과 인재육성에 전력을 다한다. 또한 리 장군 사후, 1975년 미의회는 그의 미국시민권을 회복해 주었다.

말하자면, 북부의 지도자들은 패배한 남부인들에 대한 죄과를 묻지 않았던 전범자 없는 대규모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남북이 과거의 둘이 하나가 되게끔 만든 데에는 승리한 북부의 오만함도 패배한 남부의 좌절감을 최소화하기 위한 지도자들의 미래를 내다보는 현명한 리더쉽이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통일문제를 얘기하면서 대개의 경우 독일 통일의 사례를 많이 인용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미 대륙을 왕복 횡단하면서, 거대한 나라가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에 주목했다.

즉, 우리의 통일문제를 생각하면, 통독사례 못지않게, 우리의 남북통일 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보여준 좋은 귀감이라고 생각하며, 스톤 마운틴을 뒤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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