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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성의 횡단여행] 월남패망 직후 메콩델타의 농업집단화와 그 이후

[전운성의 횡단여행] 월남패망 직후 메콩델타의 농업집단화와 그 이후

  • 기자명 전운성
  • 입력 2022.11.0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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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성 횡단여행가,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명예교수
전운성 횡단여행가,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명예교수

[뉴스더원=전운성 횡단여행가] 몇 해 전 국민방송KTV의 ‘헬로차이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농업-베트남 편’을 제작하기 위해 촬영팀과 현지로케를 떠났었다.

하노이에 도착하여 여러 현장을 방문하고 마지막 코스로 호치민시 남쪽의 메콩델타의 중심지 컨터로 향했다.                                 

사실 이번 방문 외에 1996년부터 여러 차례 이 나라를 방문했었다. 그러면서 1975년 4월 사이공이 북베트남에 함락되면서 수많은 난민들이 작은 보트에 의지한 채 남중국해의 망망대해를 떠돌았던 보트 피플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점은 현지 방문을 통해 단숨에 풀 수 있었다.

베트남은 델타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남북에는 각각 메콩델타와 홍강델타 등이 펼쳐져 있다. 특히, 메콩델타는 길이 약 300km에 폭이 400km나 되는 엄청난 크기로 호치민 남쪽은 물론 캄보디아 프놈펜까지 뻗친 대평야다.

메콩델타에서 벼 탈곡작업을 하는 광경. (전운성)
메콩델타에서 벼 탈곡작업을 하는 광경. (전운성)

델타의 베트남 쪽에만 대략 1900만 명이 거주하며, 남한 면적의 약 40%나 되는 400만ha에서 생산되는 쌀은 베트남 전체의 절반이나 된다. 한편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홍강델타 역시 약 150만ha로 베트남 쌀 생산의 약 18%를 점하고 있다.  

아무튼 26년 전 메콩델타를 처음 방문하여 2주 정도 머물면서, 초라하게 느껴지던 컨터시는 현재 120만 명 이상의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환경도 월등히 개선되어 과거에 보인 절대 빈곤 티는 벗어나, 주민소득은 물론 농업생산성 등은 통일직후의 사정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메콩델타에서 무를 수확하는 농부들. (전운성)
메콩델타에서 무를 수확하는 농부들. (전운성)

북베트남은 1975년 사이공을 함락한 뒤, 남베트남 전 지역에 사회주의 제도를 강력하고 철저히 그리고 빠르게 이식시키기 위하여 훈련된 개혁요원을 대량 파견한다.  

특히 점령 직후 호치민시로 개칭된 사이공시와 농업 중심지역인 메콩델타는 그 개혁의 중심 대상지였다. 이 지역은 자본주의시장경제가 가장 왕성하게 살아 움직이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통일 공산정권은 이들 지역의 강한 자본주의적 요소를 없애지 않고는 사회주의화를 달성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사회주의화가 진행되면서, 사회주의 사상교육과 강제노동을 피하기 위해 이 지역의 많은 농민들과 사이공의 촐론지역에 모여 살던 중국인들은 남중국해의 보트피플이 되어 해외로 탈출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농업 중심지인 메콩델타의 경우에도 공산정권은 과거의 개인농을 부정하고 집단농장제를 보급하기 시작한다. 이는 강력한 군대를 배경으로 하노이에서 대량 파견된 토지개혁 요원에 의해 철저히 추진한다.

그런데, 이러한 집단농장제에 저항하는 메콩델타 농민들의 거센 저항에 통일된 지 10년이 지나도록 메콩델타의 농업집단화율은 10%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이들 농민들은 베트남전쟁이 한창일 때는 부패한 월남정부에 등을 돌리고 공산게릴라인 베트콩에 대한 지지를 아끼지 않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활에 익숙해진 메콩델타의 농민들은 체질상 도저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노이 주변 홍강델타 광경. (전운성)
하노이 주변 홍강델타 광경. (전운성)

처음 집단농장제를 실시할 때는 자발적으로 협동농장에 가입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의 진행이 시원치 않자 농민의 가입을 강제한다. 즉, 가입을 거부한 농민에게는 비료, 연료, 살충제 구입을 못하게 하였다.

나아가 국내여행 조차도 허가증을 내주지 않았다. 또한 그 자녀에게는 학교에 못 다니게 하는 등 상급학교 진학과 취업할 때도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농업집단화 추진은 농민의 생산의욕을 잃게 하여 만성적인 식량부족의 한 원인이 된다.

즉,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과대평가했던 것이다. 오히려 통일 후 10년 뒤에는 남쪽의 시장경제 체제가 하노이를 향하여 북상하는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메콩강의 코코넛을 운반하는 배. (전운성)
메콩강의 코코넛을 운반하는 배. (전운성)

1988년에 베트남 공산정권은 일관되게 채택해 온 농업정책의 핵심이랄 수 있는  농업집단화 정책을 후퇴 또는 중단시키는 정치국 결의를 채택한다. 이리하여 1991년에 사유제를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토지소유제도 모습을 보인다.  

즉, 남베트남에서 집단농장제를 실시한지 10여년이 지나 결국 사회주의화의 속도를 늦추고 이윤개념을 도입하는 등 시장경제 개념을 인정하는 도이모이 쇄신정책을  추진한다. 이리하여 마침내 1989년 마침내 식량자급을 달성하고 1990년대에 들어서부터 사정이 180도 바뀌어 예전의 세계3대 쌀수출 대국의 명성을 회복하였다.  

이를 보며, 영국의 18세기 농학자 아서 영이 지적한 ‘소유의 마력은 모래를 황금으로 만든다’는 말을 떠올리며, 아직도 집단농장 체제를 고수하는 등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허덕이는 북한의 모습과 겹쳐지고 있었다. 이곳을 떠나기 전 본, 메콩강은 여전히 오가는 배로 분주했고 수상시장은 흥청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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