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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성의 횡단여행] 다시 찾은 킬링필드

[전운성의 횡단여행] 다시 찾은 킬링필드

  • 기자명 전운성
  • 입력 2022.1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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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성 횡단여행가,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명예교수
전운성 횡단여행가, 강원대 농업자원경제학과 명예교수

[뉴스더원=전운성 횡단여행가] 코로나가 만연되기 전, 캄보디아 하면 바로 연상되는 곳 중의 하나인 킬링필드를 찾았다. 사실 이곳은 18년 전인 2004년 첫 방문 이래 여러 번 찾았고, 그 때마다 날로 변해가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  

처음 이 나라에 오기 전에는 이 나라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식민지 경험, 가난, 정치적 혼란, 내전과 베트남과의 전쟁 그리고 폴 포트 공산정권하에 저질러진 대량살인 등으로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던 것은 크메르제국이 남겨 놓은 위대한 앙코르 와트가 마음 한구석에 살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각종 지뢰가 길에 깔려 있어 접근하기 힘들 거라고 겁을 주고 있었다. 마치, 캄보디아에 들어간다는 것은 21세기에 남은 탐험지대를 가는 듯한 당치도 않은 이야기들이 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와본 이 나라는 가난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시달리고 있음은 사실이었으나, 다양한 자원보유국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은 결코 작지 않았다.

캄보디아 북서부의 중심지 바탐방 인근 사원의 킬링필드 위령탑. (사진=전운성)
캄보디아 북서부의 중심지 바탐방 인근 사원의 킬링필드 위령탑. (사진=전운성)

대충 이 정도의 상식을 가지고 킬링필드의 현장을 찾았다. 먼저 찾은 곳은 프놈펜 시내의 뚜얼 슬렝 박물관이었다. 원래 고등학교였으나, 지난 정권하의 관리나 정적 숙청을 위한 고문 장소였다. 한번 들어오면 살아나가기 힘든 악명 높던 곳이었다.

건물 안에는 사람을 가뒀던 어두컴컴한 좁은 방들과 사람들이 잡혀가거나 죽어간 사람들의 흑백사진과 그림으로 가득했다. 이처럼 같은 동족임에도 이념이 다르다 하여 인간이 이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이어 소위 킬링필드의 대명사 격인 프놈펜 근교 쯔응 아익에 위치한 위령탑을 찾았다. 평야지대 한가운데 약 80여 미터의 높이의 사각형으로 된 탑 안이 잘 들여다보이도록 유리로 둘러싸여 있었고, 뾰족한 첨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킬링필드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그린 뚜얼 슬렝 박물관 내의 그림. (사진=전운성)
킬링필드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그린 뚜얼 슬렝 박물관 내의 그림. (사진=전운성)

탑의 각 층 유리 안에 유골을 안치하여 밖에서 해골이 잘 보이도록 만들어 놓았다. 어른 유골은 물론 어린아이의 유골로 보이는 머리에 죽창으로 찔린 듯한 구멍이 몇 개씩 나 있었다. 아울러, 당시에 그들이 입었던 낡은 옷들도 함께 전시되어, 그 당시의 죽어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을 헤아려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유골탑은 전국 200여 곳에 만들어 놓아 과거의 잘못된 일을 거울로 삼고 있었다. 바탕방 인근의 한 절을 찾았을 때도 이삼백 개의 유골이 위령탑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위령탑 주변에는 크고 작은 집단으로 매장된 웅덩이가 흩어져있어, 당시의 비참한 상황을 알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전국토가 킬링필드 현장이었다.

사실 킬링필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4년 영화 <킬링필드>를 제작하면서 공산 크메르 루즈군의 만행이 폭로되면서 부터이다. 1975년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함에 따라 약화된 캄보디아의 친서방측 론놀정권은 폴 포트가 이끄는 붉은 크메르라는 뜻의 공산 크메르 루즈군에 의해 무너진다.

킬링필드 당시 희생된 사람을 쯔응 아익 위령탑에 안치한 모습. (사진=전운성)
킬링필드 당시 희생된 사람을 쯔응 아익 위령탑에 안치한 모습. (사진=전운성)

그는 농민천국을 건설한다면서, 민주 캄푸치아로 국명을 바꾸고 좌파 이념을 강화하여 반대파를 숙청하고 미국과의 외교단절, 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하였다.

이후 1979년 1월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함락할 때까지 약 4년간 자국민을 대상으로 대량학살을 자행한 사건을 일컬어 킬링필드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도시인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화폐와 사유재산, 종교를 폐지했다.

이들의 잔인무도한 행위는 이때부터 시작했다. 또한 그는 거의 모든 지식인들을 포함해서 조금이라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깡그리 색출해 잔인하게 죽였다. 영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안다거나, 손이 곱다거나, 얼굴이 깨끗하거나 하면 소위 지식인으로 낙인찍어 사살했다.

총알을 아끼기 위해 사람들에게 땅을 파게 한 뒤 그곳에 생매장하거나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사시키고, 우물에 마구 집어넣어 죽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살해된 사람이 당시 캄보디아 전체 인구 약 7백만명 가운데 2백만명 정도로 알려져 있으니, 참으로 온몸에 전율을 일으킬 정도의 참상이었다.  

프놈펜 근교 쯔응아익 위령탑 내의 유골과 옷가지들을 보는 관광객. (사진=전운성)
프놈펜 근교 쯔응아익 위령탑 내의 유골과 옷가지들을 보는 관광객. (사진=전운성)

킬링필드 현장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으면 이렇게 해서라도 후세에 알리려고 했을까,,, 실제로 농촌지역을 다니면서 만난 당시에 살해된 가족들의 눈에는 아직 그 광경이 잊어지지 않는 듯 눈을 감곤하였다.

문제는 당시에 엄청난 지식인의 대학살은 교사, 관리, 기술자, 경영자, 의사 등이 절대 부족한 사회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경제발전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인재 부족으로 이어져 한 세대 이상 사회발전을 더디게 만들었다.

그런데, 다시 찾은 킬링필드 입구에 지뢰 등으로 다리 등이 잘린 불구자들이 목발에 몸을 의지한 채, 오는 관광객들에게 손을 내밀던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주변은 말끔히 정리되어 과거의 아픈 상처는 아물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당시 죽은 사람들이 묻힌 장소나 해골을 전시해 놓은 높은 기념탑 등은  그대로 세월을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폴 포트 정권에 희생된 비참했던 과거와 미래의 잠재력을 가진 캄보디아 속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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